아니, 어찌 보면 복이란 것도 화란 것도 없는 것인지 모른다. 그냥 인간의 마음이 그렇게 규정하고 설정한 것일 뿐.

 

누가 실연을 당했다. 실연을 당한 이유는 상대방은 자신만큼 사랑의 감정이 없었거나, 사랑의 감정은 있었지만 바람을 피웠거나, 아니면 다른 사정이 있었거나 등등 여러가지일 것이다. 어쨌든 관계는 끝났다. 그런데 실연 당했다는 사실에만 몰두하면, 버림 받았다는 사실에 상처를 입는다. 그 전의 관계로 되돌리고 싶다는 욕구가 강하면 강할수록 상처는 더 깊어진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소유물에 애착을 보이는 것은 놔두고라도, 농민이 농작물에 애착을 보이고, 사람들이 애완동물에 애착을 보이고, 예술가가 자신의 창작품에 애착을 보이는 데서도 알 수 있듯이, 비록 일방적인 감정이라 해도 감정을 쏟는 대상에 대해서는 누구나 애착이 생기기 마련이다. 그리고 그 대상이 사라지면 상실감을 겪는다. 이보다 더 복잡한 것이 감정을 서로 주고 받는 인간관계이고, 그중에서도 연인관계나 부부관계는 애정이라는 강렬한 감정이 관계된 것이기 때문에 그만큼 상실의 아픔도 크다.

 

따라서 실연의 아픔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건강한 삶에서는 아픔을 치유하고 극복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왜냐하면 삶에서 관계는 만나고 헤어지고 만나고 헤어지는 리듬을 타는 것이 필연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헤어짐은 실연처럼 의지적인 이별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죽음 같은 불가피한 이별 또한 헤어짐이다. 따라서 우리가 살아가는 동안 우리는 무수한 만남과 헤어짐을 경험한다.  이 때문에 실연, 상실, 이별의 슬픔을 극복해야 하는 것은 당연지사인 것이다.

 

북미원주민(인디언)들은 남편이나 아내나 사랑하는 이가 죽으면 3일 동안만 슬퍼하는 게 관례였다고 한다. 이 3일 동안 충분히 애통해하고, 그리워하고, 그리고 고인이 편안하게 저 세상으로 갈 수 있도록 놓아주는 것이다. 그리고 사흘이 지나서도 여전히 애통해하고 연연해하면서 고인을 떠나보내지 못하는 경우에 대해서는 지나치다고 보았다. 사랑하는 이의 죽음에 대해서도 3일밖에 애도의 기한을 설정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인디언들은 이보다 덜한 이별의 아픔을 극복하는 데 그리 긴 시간이 필요하지 않다고 여겼으리란 걸 알 수 있다. 인디언들이 죽음 등의 헤어짐으로 인한 상처에 빠져들지 않았던 것은 그것이 인간의 힘으로는 바꿀 수 없는 자연의 섭리라고 보았기 때문일 것이다. 또 자연의 섭리인 이상, 그것은 복도 화도 아니라고 보았다.

 

반면에 현대인들의 의식 속에서는 자연의 섭리보다는 인간의 의지가 극대화되어 있다. 덕분에 상당수의 현대인들이 진시황이 가졌던 불로초에 대한 욕심을 가지고 있다. 자연재해와 인재의 구별도 모호해졌다. 현대인들은 과학의 힘과 인간의 힘으로 죽음도 막을 수 있고, 자연재해도 막을 수 있다고 여긴다. 하물며 사람간의 여러 관계들이나, 과업의 성취라면 더 말할 것도 없이, 주체가 원하는 바람직한 결과대로 이루어낼 수 있다고 여긴다. 불가능하다든지, 노력했지만 운이 닿지 못했다든지 하는 이야기는 그냥 주최측의 변명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예전에 작은학교 입학생 선발시에 불합격한 아이가 있었는데, 그 부모가 학교 홈페이지에 어떤 기준으로 자기 아이를 불합격시켰는지 학교측에 따지는 항의 비슷한 글을 올린 적이 있다.  사실 대안학교의 입학 기준은 성적으로 뽑는 것이 아닌지라 외부인들 눈에는 주관적으로 보이는 경우가 많다. 말하자면 항의할려면 얼마든지 항의할 수도 있는 대목이다. 그런데 그 글에 대한 댓글의 하나로 재학생 중 한 명이 '인연이 닿지 않아서' 그런 게 아니겠느냐는 간단한 멘트를 단 것을 보았다. 아마도 이 글을 쓴 학생은 작은학교의 교육철학인 인드라망 세계관에 영향을 받아서 이런 멘트를 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학생의 이 댓글을 본 나는 학교가 공연한 시비에 휩싸이지 않을지 긴장하고 염려하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는 것을 느꼈다.  교사들은 이것을 좀더 논리적으로 작은학교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아이를 우선 선발기준으로 삼았다고 표현했다.

 

우리가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사실 사람 삶의 많은 부분이 인연 따라 흘러간다. 배우자를 택할 때도 대한민국에 약 500만명에 달하는 이성 후보자가 있다고 하면, 그 500만명을 일일이 다 확인해보고 그 중에 한 사람을 고르는 것이 아니다. 설사 결혼정보회사의 중개를 통한다 해도 인연이 닿아야 한다. 인연이 닿지 않으면 수백번의 맞선 자리도 소용이 없다. 흔히들 땅도 주인이 따로 있다고 하지만 간단한 소비물품을 살 때 역시 마찬가지다. 성적이 주요 변수로 작용하는 대학 진학도 따지고 보면, 성적순으로 대학과 학과가 정해지는 게 전혀 아니다. 때로는 성적도 좋고, 오랜 시간 준비해온 학과였음에도 유독 그 해에 그 학과의 경쟁률이 높아서 낙방하는 경우도 있다. 혹은 평소에는 잘하다가 정작 본 시험에서 실패하는 경우도 있어서 우리는 흔히 '시험운은 따로 있다'는 실없는 농담으로 서로를 위로하기도 한다.

 

이렇게 보면 역으로 우리 삶에서 인위로, 말하자면 우리가 노력해서 이루어낼 수 있는 결과는 그리 많지 않다.  따라서 개인의 의지에 따른 독자적인 목표를 세우기보다는 만약 그런 목표가 있다면 먼저 내려놓기를 하고, 그런 다음 세상이 어떻게 흘러가고 있는지 지켜보는 게 더 낫다. 열린 마음으로.

 

물론 자신은 세상의 이치를 충분히 꿰고 있고, 발생할 수 있는 변수를 충분히 고려하여 목표를 세운다고 하는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이다. 뭐 이렇게 과감하게 단언하지는 않더라도 자신이 설정한 목표가 합당하고 현실적이라고 여기는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이런 자신감에서 출발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것이 석가모니 부처님이 말한 인간의 탐진치 중에서 '치'(어리석음)이다. 우리가 아는 역사상의 성인과 현자들은 사람이 겸허하고 또 겸허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하지만 자본주의 사회는 겸손이나 겸허함 따위는 개에게나 줘버리고 자신감을 마음껏 드러내고, 심지어는 자만해도 좋다고, 아니 그래야 살아남을 수 있다고 가르친다.

 

나는 지금도 고등학교 시절 사회 선생님이 '이제는 자기 피알(선전)을 잘해야 하는 세상이 되었다'고 말했을 때 받았던 심리적 이질감을 기억한다. 아마 사회교과서에도 적혀 있던 내용이었을 것이다. 그 당시 '우리는 지금까지 그렇게 배우지 않았는데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던 기억이 있다. '뻔시럽게 자기 피알이라니, 난 평생 가도 그렇게 못할 거야.'라는 생각과 함께. 다행히 우리 세대는 '빈 수레가 요란하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의 정신이 더 통용되던 사회를 살아왔다. 하지만 지금은 그렇지 않다. 다들 너도나도 남보다 좀이라도 고개를 더 높이 치켜들고 자기 피알을 적극적으로 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는 세상이라고 생각하는 듯하다.  이 모두가 세상을 내 뜻대로, 다시 말해 인간의 의지대로 주무를 수 있다는 과도한 자신감, 오만함의 발상이다.

 

이 때문에 현대인은 내려놓기를 못한다. 목표를 세우고 자신이 세운 목표에 욕심을 낸다. 그리고 목표를 달성하지 못하면 좌절하며, 자신감마저 추락한다. 자신이 설정한 목표와 자신의 정체성을 동일시하는 것이다. 자신이 설정하고 욕심 내는 목표가 순리에 맞지 않는 애초에 잘못된 목표였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여러 번의 좌절 끝에 실패에 대한 변명거리가 필요해져야 떠오른다.  

 

그런데 목표를 세우지 말라는 내 권유가 아무리 해도 잘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현대인들은 목표가 없으면 삶이 방향성이 없어지고, 따라서 할 일도 없어진다고 알고 있기 때문이다. 현대인들은 성적을 잘 받겠다는 목표가 있어야 공부를 하게 되고, 풍족하게 살겠다는 목표가 있어야 돈을 버는 일을 하게 되고, 권력을 갖겠다는 목표가 있어야 정치를 하게 되고, 많이 알고 싶다는 목표가 있어야 지식인이 된다고 생각한다. 혹은 방을 깨끗이 정리정돈하겠다는 목표가 있어야 청소를 하게 되고, 3일 동안 영어단어 50개를 외우겠다는 목표가 있어야 영어공부를 하게 되고, 금연을 하겠다는 목표가 있어야 담배를 끊게 되고, 어느 지역을 관광하겠다는 목표가 있어야 여행에 나서게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이렇게 크고 작은 목표들을 세우고, 그것을 실현해내는 것으로 자기 삶의 내용물 대부분을 채우는 의지력이 강한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를 포함한 상당수의 사람들은 목표 달성률이 50%에도 훨씬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을 뿐 아니라, 달성한 목표들도 달성해놓고 보면, 일순간의 자기 만족감을 빼면 '그래서 뭐 어쩌라고?'인 상황이 대부분이다. 예컨대 스카이 대학에 들어가는 것을 목표로 열심히 공부한 학생이 결국 그 대학에 들어갔다고 해보자. 널널한 성적으로 합격한 학생은 목표를 이뤘다는 게 그렇게 감격스럽지 않을 것이지만, 그래도 앞으로의 대학 생활은 그다지 부담되지 않을 것이다. 반면에 턱걸이로 간신히 합격한 학생은 목표를 이룬 것이 무척 감격스럽긴 하겠지만, 한편에서는 앞으로의 대학생활을 잘해낼지 벌써부터 걱정스럽기만 할 것이다. 결과적으로 전자의 학생은 자신이 세운 목표가 3등인 학생이 계속 3등 하겠다는 목표를 세운 것에 다를 바 없다는 걸 느낄 것이고, 후자의 학생은 하나의 목표를 달성해봤자 '산 넘어 산'이라고 느낄 것이다.

 

이러니 목표를 세우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나의 목표를 달성했든 아니든 전체적으로 진행되는 상황은 변함이 없는데 말이다. 오히려 특정한 목표를 세우고 그것에 매진한 것이 자신을 다른 상황들에서 눈 돌리게 만들었다면? 이 때문에 오히려 자신을 실현할 수 있는 다른 많은 기회들을 놓치고 말았다면?

 

그러니 인간의 좁은 인지로 하는 일- 목표를 세우는 것-은 자제하는 것이 좋다. 사실 목표는 사람이 만든 또 하나의 인조건물에 지나지 않는다. 하지만 태어난 이유도 모르고 태어난 인간이 할 일은 왜 태어났는지를 알아보는 것이지, 일찌감치 달팽이껍질 같은 집 하나 지어 거기에 틀어박히는 걸 목표로 삼는 건 자기 자신을 너무 노골적으로 한치 앞도 볼 줄 모르는 존재로 만드는 게 아닐까?

 

물론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는 것이 긍정적인 면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 단시간에 이루어질 수 있는 일이라면 분명한 목표를 세워놓고 그 일을 시작하는 것이 좋을 수 있다. 그 일에 관해서는 자기 규제와 자기 동력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는 것의 부작용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 특정 목표를 세우고 그것에 자신을 몰아넣는 것은 자신을 갇히게 한다. 삶의 다른 경험과 기회들을 차단할 수 있는 것이다.

 

예전에도 한번 인용했던 우화지만, 신심이 깊은 어느 신자가 사는 마을에 비가 너무 많이 내려 홍수가 났다. 신심 깊은 이 남자는 집의 지붕을 타고 넘쳐나는 물 위에 떠 있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믿음에 대한 확신이 너무나 깊어 신이 자신을 구원해주리라고 믿었는데, 결국은 물에 빠져 죽고 말았다. 그는 죽어서 하느님 앞에 나가 불평을 했다. 왜 자기를 구해주지 않았느냐고. 그런데 하느님이 도리어 반문했다. "내가 너를 구해주기 위해 소방대 헬기도 보내고, 보트도 보냈는데, 왜 너는 그 구원의 손길을 마다했느냐?"고. 그러니까 신심 깊은 그 남자는 그야말로 하늘에서 천사의 목소리가 들리고 허공에서 구원의 밧줄이 드리워지는 기적을 통해 자신이 구원받으리라 여겼기에, 소방대원과 이웃 주민이 도움의 손길을 내밀었을 때, 필요없다고, 자신은 따로 구원받을 것이라고 손을 내저었던 것이다.

 

구체적인 목표를 세운다는 건 이처럼 자칫 협소하기 그지없는 시야에 갇히는 것이다.  그리고 전능한 신을 무시하면서 자신을 구해줄 구체적 방법까지 신에게 강요하는 꼴이다. 그렇다면 과연 이 남자의 신심이 올바른 신심일까? 아마도 좀 성깔 있는 신이었다면, 남자가 불평할 때 '나 참, 그럼 니가 신 해라!'고 쏘아붙였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이렇게 구체적인 목표를 세워놓고, 이 목표를 이루는 데 몰두하고 욕심을 내는 건 이제 협소한 시야를 자신이 지은 감옥으로 형상화하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사실 목표를 세우고 안 세우고는 중요한 게 아니다. 목표를 세우는 게 자신이 살아가기에 편하고 효율적이라면 그렇게 하면 된다. 문제는 자신이 설정한 목표가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걸 느끼면 언제든지 내려놓을 수 있는가 아닌가이다. 그래서 너무 세부적이고 구체적인 목표를 세우면 목표를 계속 변경해야 하는 문제가 있으므로, 차라리 목표는 원대하고 포괄적이고 추상적으로 세우는 것이 좋다. 이렇게 하면 자신의 예상과 다른 중간 결과를 얻을 때도 굳이 내려놓기를 할 필요가 없다. 그냥 그 결과를 현실로 받아들이면 된다.

 

하지만 사람은 처음부터 현명한 길을 택하지는 않는 법이어서 많은 시행착오를 거쳐서 길을 찾아가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도 그렇고 많은 사람들이 무심결에 구체적인 목표를 설정하고, 그걸 추구하다 보면, 그간에 자신이 들인 정성과 노력이 아까워서라도 그 목표에 집착하게 되고 쉽게 내려놓지를 못하게 된다. 그런데 내려놓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지하고 자신이 집착하던 그 목표를 일단 내려놓기로 결단하면, 어떻게 될까?

 

내려놓는다는 건 원하던 목표가 이루어지지 않아도 '할 수 없다'거나 '어쩔 수 없지, 뭐'라고 포기하는 것인데, 이렇게 마음 먹을 수 있으면 우선 긴장과 스트레스가 훨씬 줄어든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이 편해지면, 오히려 원하던 목표를 이루기도 한다. 여러 해 동안 불임이었던 부부들이 아이를 갖기 위해 했던 여러 시도들을 마침내 포기하고 난 후, 예상치도 않게 아이가 생기는 경우들이 종종 있다. 혹은 아이 갖기를 포기하고 입양을 했는데, 갑자기 아이가 들어섰다는 경우들도 있다. 성경의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요'라는 문구를 기계적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은 강렬히 원할수록  원하는 목표를 이룰 가능성이 더 커진다고 여기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신이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적은 <신과 나눈 이야기>라는 책에서 신은 "너희는 신과 동업하고 있다. 우리는 영원한 계약을 맺은 사이다. 너희에게 주는 내 약속은 너희가 요구하는 건 언제나 주겠다는 것이다. 너희의 약속은 구하는 것, 구함과 응답의 과정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하면서, 그런데 사람들이 이 구함의 과정을 잘못 이해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서 신은 "너희는 너희가 청하는 걸 갖지 못할 것이며, 너희가 원하는 어떤 것도 가질 수 없다. 너희의 요구 자체가 결핍에 관한 진술이며, 뭔가를 원한다는 너희의 진술은 정확히 그런 체험, 곧 모자람을 너희의 현실에 만들어내는 작용을 할 뿐"이라고 단언한다.

 

그러니까 어떤 목표에 집착하거나 매달리는 건 실상 그 목표가 실현되지 못하도록 밀어내는 행위를 하는 것과 같다. 반면에 포기하는 건, 그 목표가 실현될 수 있는 여러 가능성들이 접근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주는 행위와 같다. (물론 그렇다고 진짜로 포기한 것도 아니면서 포기한 척 하는 건 기만술에 불과하여 전혀 의미가 없다.) 이 때문에 오히려 포기하는 것이 그 목표가 실현될 가능성을 높이는 결과를 가져오기도 하는 것이다.

 

내려놓았을 때 나타나는 두번째 효과는 협소하던 시야가 넓어진다는 것이다. 특정한 목표에만 꽂혀 있어서 좁혀질 대로 좁혀져 있던 시야가 그 목표에서 눈을 떼면, 특별히 집중해서 바라봐야 할 특정한 목표가 없기에 그야말로 하릴없이 주위도 둘러보고 지금까지 왔던 길도 되돌아보고 앞으로 가야 할 길도 내다보게 된다. 나이가 좀 든 우리같은 사람들이 이따금 10년전이나 20년전의 자기 모습을 되돌아보다 보면, '지나놓고 보니 아무것도 아닌 일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왜 그렇게 그것에 집착하고 안달복달했었지?' 하면서 실소할 때가 있다. 그런데 시야가 넓어지면 10년이나 20년을 더 살아보지 않고서도 현재 시점에서 상황을 주관적 우선순위로가 아니라 좀더 객관적으로, 합리적으로 파악할 수 있게 된다. 사실 넓은 시야는 자기 에너지를 불필요하게 낭비하지 않고 성공적인 삶을 살 수 있게 해주는 주요한 자산이다.

 

시간적으로만이 아니라 공간적으로도 시야가 넓어지면, 주변 세상을 더 잘 볼 수 있게 된다. 예전에 자기 아이 시험 성적 높이는 것만을 목표로 하고 살 때는 이웃집 아이를 봐도 쟤는 공부를 잘하나 못하나만 주요하게 보았지만, 그런 목표가 없어지면 이웃집 아이를 좀더 있는 그대로 보면서, '아, 저 나이의 남자아이는 저런 특성이 있을 수 있겠구나'라든지, '우리 아이가 저 애를 마음에 (안)들어하는 이유를 알 것 같네' 등등 새로운 사실들이 눈에 들어온다. 말하자면 세상에 대해 더 많이 알아가는 과정이 된다.

 

이렇게 선입견 없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것, 이것이 지켜보기이다. 그런데 지켜본다는 표현 때문에 제 3자로서, 방관자로서 지켜보는 것으로만 오해하면 안 된다. 경험하면서 지켜보는 것도 지켜보기이다. 단 뭔가를 이루겠다거나 뭔가를 얻겠다는 구체적 목표가 상황을 압도하지 않는 상태의 경험이어야 한다. 그럴 때 경험하면서, 참여하면서, 창조하면서 지켜볼 수 있고, 이렇게 하면 자신이 지켜보는 상황이 더 잘 이해될 때가 많다.

 

인디언 사회도 그렇지만 전통사회들에서는 이 지켜보기가 아이들 교육의 주요 부분이었다. (인디언 사회는 더 철저하게 지켜보기의 원칙을 견지했다.) 요즘처럼 모든 것을 말과 글과 지식으로 전해준 것이 아니라, 자연과 세상의 이치를 충분히 관찰하고 지켜보게 해서 아이들 스스로 깨닫는 힘을 키우는 것이 교육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현대인들은 단편적 지식은 옛사람들보다 더 많을지 몰라도, 지켜보고 관찰해서 얻는 지혜는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인들은 자연이나 세상의 이치를 잘 모르고, 이해하지도 못한다. 이 때문에 현대인들은 기계 부품 같은 분업화, 전문화가 싫지만, 자기 분야가 아닌 분야는 아해도 못하고, 자기 분야가 아닌 분야에서는 살아갈 능력도 없다. 현대사회가 워낙 복잡해지고 고도화되어 그런 면도 있지만, 내가 보기에는 현대인의 삶이 기본적으로 지켜보고 이해하는 과정이 아니기 때문인 요인도 큰 것 같다. 이렇게 되면 창의성과 도덕성, 직관력 같은 인간으로서의 잠재력이 꽃을 피우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이 '전문가'라는 미명하에 기계 비슷해지고 만다.  

 

사실 어린아이들이 아무런 목표 없이 그냥 세상이 신기해서 자연과 세상과 사람들을 지켜보면서 이것들을 조금씩조금씩 알고 이해해가는 과정 - 이건 어린아이 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 이 거대한 우주와 세상의 진리를 다 알아내기에는 인간의 수명이 너무나 짧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우리는 이 짧은 시간마저 더 짧게 만들어 3, 40년만 살고 나도 세상에 대한 호기심을 포기하고, 어쩌다 얻은 알량한 지식 몇 가지로 버티며 남은 인생을 살겠다는 게으른 완고함이 그 자리를 차지하도록 놔둔다. 하지만 이 지켜보고 이해하기가 어린아이 때만이 아니라 평생 유지될 수 있다면, 우리가 얻게 될 이득과 혜택은 엄청나다.

 

내려놓고 지켜보고 이해했을 때 나타나는 세번째 효과는 응용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선입견 없이 지켜보기 때문에 객관적 원리가 이해가 되면, 이제 주변의 다양한 요소들을 자신이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아이디어로 삼을 수 있게 된다. 지켜보기가 여전히 모방의 단계였다면 응용하기는 창조의 단계다.

 

예전에 명상법의 하나로 소개된 것 중에 다음과 같은 것이 있었다. 일종의 '문제해결' 명상법인데, 그건 우선 자신이 에너지를 쏟고 있는 문제 하나를 선정한다. 그리고 그 문제와 관련된 여러 정보들을 충분히 인지한다. 그렇게 그 문제와 관련된 모든 측면들을 확인했다고 생각하면, 서류들을 덮고 명상을 한다. 일종의 화두처럼 명상을 하면서 그 문제를 계속 부여잡을 수도 있지만, 머리 속에서 다른 생각으로 넘어가도 개의치 않는다. 더 좋은 건 잡념을 최대한 줄이고 명상 상태로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 있다 보면 어느 순간 그 문제를 해결할 아이디어가 떠오른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명상은 내려놓기와 지켜보기, 응용하기를 접합시켜줄 수 있는 방법이란 이야기다.

 

사실 아인슈타인을 비롯하여 뛰어난 과학자들도 명상과 비슷한 방법으로 새로운 발견을 한 경우들이 많다. 멘델레예프가 원소주기율표를 꿈에서 보고 발견했다는 유명한 일화가 있지만, 아인슈타인도 연구 과정에서 반수면 상태에서 떠오른 생각을 중시했다고 한다. 그리고 자기 호흡이나 생각을 관조하는 위빠사냐 명상법도 일종의 지켜보기라고 할 수 있다.

 

하여튼 너무 큰 주제를 짧은 글로 커버하려다 보니 이야기가 두서가 없어졌지만, 자본주의 사회인 현대사회는 잘못된 상식이 많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래된 지혜를 너무 쉽게 무시하기 때문이고, 인위적인 것에 대한 믿음이 지나치기 때문이다. 목표 중시 풍조도 그 중의 하나라 할 것이다. 게다가 이 목표 중시 풍조가 아이들에 대한 훈육이나 교육에 적용되면 심각한 문제를 만들어낼 수 있다. 하지만 오래된 지혜들은 하나같이 마음을 비우고 욕심을 버리라고 가르치고 있다. 그 중에 하나, 노자에 나오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로 이 글을 끝낼까 한다.  신영복 선생님 번역이다.

 

"서른 개의 바퀴살이 모이는 바퀴통은 그 속이 '비어 있음'으로 해서 수레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진흙을 이겨서 그릇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그릇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문과 창문을 내어 방을 만드는데 그 '비어 있음'으로 해서 방으로서의 쓰임이 생긴다. 따라서 유(有)가 이로운 것은 무(無)가 용(用)이 되기 때문이다."

 


2013. 5. 22. 금안당


* [대안 시선]에 업로드되는 글은 파주자유학교 전체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날짜

2013. 5. 22. 10: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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