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이건 어른의 시각이다. 아이의 입장에서 이런 온정주의는 자칫하면 엄마와 교사를 만만하게 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예상되는 결과는 두 가지 중 하나일 것이다. 하나는 아이가 엄마(혹은 교사)의 너그러움에 감사하면서 두 번 다시 그런 일을 하지 않는 경우다. 이제 같은 잘못을 반복하는 건 그 행위 자체가 잘못일 뿐 아니라, 자신을 믿어준 엄마에 대한 배신이기도 하다는 걸 깨닫고 아이는 절대로 같은 잘못을 되풀이하지 않는다. 다른 하나는 자신의 잘못이 덮어지거나 감해지는 경험을 한 아이는 그 잘못에 대해 책임진다는 게 어떤 것인지 경험하지 못함으로써, 잘못된 행위를 되풀이할 가능성이 더 커지는 경우이다.

 

현실에서는 어느 경우가 더 많을까?  물론 이건 개개 아이의 타고난 심성이나 그 사회의 가치관, 부모의 훈육 자세 등 여러가지 변수가 작용하므로, %로 비교하는 게 큰 의미가 있는 건 아니다. 그럼에도 이는 인간성에 대한 관점 차이--즉 단순화해서 말하면 성선설과 성악설--로까지 연결되는  주요한 철학적 문제이기도 하다. 우리나라 사람들을 비롯한 동양인들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처럼 성악설을 근거로 한 사고방식보다는 맹자의 성선설을 더 선호하는 경향이 있다. 실수가 용납되고 희망을 놓치지 않게 해주기 때문이다. 대신 더 운명론적인지라, 철저하게 인간의 능력 위주로 판단하는 자본주의 사회에 적응하는 것이 쉽지 않다.

 

다른 한편에서는 이런 상식적 온정주의와는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는 사람들도 있다. <하우스>라는 의학 미드의 주인공인 닥터 하우스도 그런 사람 중 하나다. 그는 어른, 아이, 여자, 남자 가릴 것 없이 사람은 누구나 거짓말을 한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는 환자들의 말도, 동료나 후배 의사들의 말도 믿지 않는다. 그에게는 주로 병의 원인이나 병명을 금방 파악할 수 없는 특이 환자들이 맡겨지는데, 그가 넘어야 하는 장애는 환자들의 거짓말과 다른 의사들의 사실에 근거하지 않은 예단이나 추측들이다. 그는 누구의 말도 믿지 않고 오직 증상에만 근거해서 가설을 세운다. 그리고 자신의 가설이 사실인지 확인하기 위해 심하다고 여겨지는 과감한 검사도 불사한다. 이 과정은 모든 증상에 부합하는 100% 정확한 답이 나올 때까지 계속된다.

 

하우스의 이런 과도한 돌직구에 꼼짝없이 당해야 하는 환자와 간호사, 동료 의사들의 입장에서 하우스는 그야말로 '못돼먹은 인간'이다. 다른 사람들은 하우스가 그렇게 다른 사람의 속 밑바닥까지 까뒤집는 잔인함에 경악한다. 한편에서는 그렇게 해야 진실이 밝혀지고 환자의 목숨을 구할 수 있다는 것도 알지만, 하우스를 제외한 다른 대다수 등장인물들은 하우스를 계속해서 경계하거나 하우스의 극단적인 시각을 수정하려고 애쓰거나 적대감을 드러낸다.

 

하우스에게 환자는 학생과 유사하다. 하우스는 환자가 거짓말을 해도 그 거짓말이 거짓말임을 밝혀내기는 하지만, 환자에게 거짓말의 책임을 묻지는 않는다. 오히려 책임은 환자의 거짓말을 알아내지 못한 후배 의사들에게 묻는다. 만약 하우스가 교사였다면 학생의 거짓말을 알아내지 못한 부모나 동료 교사들에게 책임을 물었을 것이다. 혹은 환자는 이미 자기 목숨을 담보로 거짓말을 한 것이니까 이미 거짓말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고 여기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외 오직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드라마 주인공들은 빅뱅스토리의 쉘든, 스타트랙의 벌칸족 스팍 같은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하우스는 이들과 달리 사람의 보이지 않는 심리까지도 일종의 fact로 파악한다.)

 

어쨌든 하우스는 겉보기에 인정 혹은 온정이라는 선을 행하는 인물은 아니다. 오히려 이를 우습게 여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악을 행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악이 생성되거나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차단한다. 그는 병원설비에 거액의 기금을 희사하겠다는 병원 이사장의 숨겨진 의도를 까발리기도 하고, 후배 의사들의 명예욕이나 이기심, 무능력 등등에 대해 한치도 덮어주는 게 없다. 결과적으로 그는 자칭 선하다고 하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정의롭다.

 

한번은 사립탐정을 고용해서 한 후배의사의 부인의 통장에 거액의 적금이 들어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후, 그걸 그 후배의사에게 알려준다. 자기 아내가 자기 몰래 큰 돈을 계좌에 넣어두고 있다는 사실을 안 후배의사는 사실이 정면으로 밝혀지는 게 두려워 이런 정보를 자기에게 말해준 하우스를 저주하면서도 아내에게 차마 물어보지를 못한다. 하지만 결국 그 돈은 멋진 스포츠카를 갖고 싶어하면서도 절대 지르지 못하는 남편의 성격을 아는 아내가 남편에게 차를 선물하기 위해 적금으로 붓고 있던 것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아마 끝까지 대놓고 후배의사가 사실 확인을 하지 않았더라면 부부간의 불신은 깊어졌을 것이고, 이런 오해는 없는 문제도 만들어내고 말았을 것이다.

 

사례가 길어졌지만, 요컨대 내 말은 아이들이라고 해서 거짓말을 하지 않는 게 아니라는 것과, 동서양을 막론하고 우리가 아이들에게 대해 가지고 있는 환상과 온정주의가 거짓말을 키우는 온상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환상과 온정주의를 가지고 있는 이유는 우리 스스로가 자신에 대해 솔직하지 못하기 때문이고, 이론 인해 지금 우리 사회는 위선으로 가득차 있다.

 

위선은 거짓말의 또 다른 얼굴이다. 위선이란 말 그대로 선을 가장하는 것이다. 앞에서 거짓말 하는 아이와 거짓말 하지 않는 아이의 차이는 거짓말 하는 방법을 배웠는가 아닌가에 있다고 했지만, 아이들은 주로 어른의 위선을 통해 거짓을 배운다. 우리 어른들은 대부분 어느 정도 위선자들이다. 성인군자가 아닌 다음에야 누구나 자신에게 100% 솔직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사회의 위선은 정도가 지나치다. 아마 체면을 중시하는 유교문화의 영향도 있어서이겠지만, 민주주의와 자본주의가 왜곡 정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자라는 아이들이 위선에 익숙해지고 거짓에 익숙해질 뿐 아니라 거짓이 통한다는 걸 배운다는 점이다.

 

사실 일반학교에서는(아니 현대와 같은 대중사회에서는)  거짓이 잘 통한다. 학교(교사)와 가정 간에 팩트를 중심으로 한 의사소통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에 양쪽을 연결하는 아이가 어떤 식으로든 거짓을 말하면 밝혀내기가 곤란하다. 반면에 규모가 작고 부모와 학교간의 만남이 상대적으로 잦은 대안학교에서는 아이의 거짓말을 밝혀내기가 상대적으로 수월하다. 그래서 대안학교 초등 아이들은 일찌감치 거짓말 하기를 포기하고 만다. (대안학교 아이들이 순진하고 순수한 건 이 덕분이다.) 반면에 중등 이상 나이에 대안학교에 처음 온 아이들 중에는 이런 학교 문화에 적응하는 데 애를 먹기도 한다.

 

이처럼 대안학교 문화가 일반학교 문화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솔직하고 순수하지만, 내가 말하고 싶은 건 더 솔직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행여라도 부모나 교사가 아이의 거짓을 방조하거나 조장하는 상황을 만들어서는 안 된다. 아이의 거짓말을 밝히는 건 그 거짓말에 대해 벌칙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최대한 자신에게 솔직한 사람, 위선과 거짓이 아닌 정직한 사람으로 자라도록 돕기 위해서이다.

 

그러려면 솔직함과 정직함이 인정받고 격려받는 사회와 문화가 존재해야 하지만, 사회 전체 차원에서 그게 되지 않는다면, 가정과 학교 환경에서만이라도 그것이 가능하도록 부모들과 교사들이 세심하게 신경 쓸 필요가 있다. 사실 우리 솔직함과 정직함이 오히려 손해인 경우가 많은 사회에 살고 있다. 그러다 보니, 교사와 부모들도 무의식 중에 이런 왜곡된 가치관의 영향에서 완전히 자유롭다고 말하기 힘들다.

 

에이브라함 링컨이 빌린 책을 훼손한 사실을 책 주인에게 솔직하게 자백한 일화는 아마 누구나 한 번쯤 들어보았을 것이다. 그런데 우리 아이들 중 한 명이 링컨처럼 자신의 잘못을 자진해서 인정했다면, 우리 어른들은 예의 그 책 주인처럼  그 아이의 정직함을 칭찬할까? 내 보기에 우리 문화에서는 책이 훼손되었다는 사실에 정신이 팔린 나머지, 그 아이가 솔직하게 잘못을 인정했다는 점의 가치는 간과되는 경우가 열에 여덟 아홉은 되지 않을까?

 

 2013. 4. 2. 금안당

 

날짜

2013. 4. 2. 02: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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