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업(판화가) <나는 농부란다> http://www.emuspace.co.kr/2013/?p=1010

 

 

삶과 교육은 둘이 아니다

 

- 소나무


 

 

“만약 학교가 진정으로 삶에 이로움을 주는 교육 기관이 되려면, 무엇보다도 학교는 교육도, 학교 자체도 그 목표로 삼아서는 안 되고 오로지 삶만이 그 필요조건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학교는 삶을 있는 현실 그대로 받아들여야 하며, 삶의 유용성을 증대시키고 밝히는 데에만 주력해야 한다.”(그룬트비, 1838) 


삶과 교육은 둘이 아니다. 애초에 둘이 될 수 없는 것들임에도 불구하고, 현재 우리 사회에서 삶과 교육은 전혀 별개의 활동으로 여겨지고 있다. 삶과 교육은 같이 동행하기엔 귀찮고 버거운 ‘길동무’가 되어버렸다. ‘먹고 사는 것이 중요하니 공부는 소홀히 해도 된다,’ 또는 ‘다른 건 못해도 공부만 잘하면 돼’라는 식의 말이 별 거부감 없이 들린다. 둘 다를 중시한다고 믿는 사람들도 필요하면 둘 중 하나는 잠시 미뤄두었다가 나중에 보충하면 된다는 식으로 말하곤 한다. ‘몇년만 공부 열심히 하고 나중에 실컷 놀면 되잖아.’ 하는 식이다. 삶을 연속되는 일련의 과정이 아니라 언제든지 보충 가능한 물건이나 되는 것처럼 말이다. 우리 사회에서 삶(일상생활)과 교육(공부)을 한 흐름으로 바라보는 인식은 참 귀하다. 오히려 삶의 부분적인 요소들에 대한 과도한 강조와 집착이 팽배하다. 이 글은 끊어져버린 ‘삶과 교육’의 고리를 연결하는 방법을  찾아보고자 하는 모색이다. 

 

 


 

I. 


씨감자를 묻으면서 이런 생각을 했던 적이 있다. 호미로 감자 심을 구덩이를 파고 눈을 보고 잘라서 재를 묻혀 놓은 감자를 구덩이 안에 놓은 다음, 흙을 덮어가는 과정은 실제로 전동드릴로 나사못을 박는 행위와 얼마나 다른가? 동작 자체만을 보면 호미질하고 감자를 놓고 다시 묻는 과정은 단순 동작의 반복이란 의미에서 ‘기계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내가 학교에서 아이들과 하는 공부는 또 얼마나 기계적인가? 만약 기계적이지 않다면 뭐라고 할 수 있을까?


밭 만들기는 3월 중순부터, 그러니까 텃밭의 얼었던 땅이 녹기 시작한 때부터 쇠스랑으로 이랑을 만들기 시작된다. 몇 년 전 집을 지으면서 전 밭주인이 애초에 다랑이 논이 있던 자리에 객토작업을 해서 일궈오던 오미자 밭이던 언덕을 패인 곳은 메우고 높은 곳은 깎아내려서 평평한 터를 만들고 그 중 일부는 밭으로 또 일부는 집터로 쓸 수 있게 토목공사를 했다. 공사를 마치고 난 그해만 해도 밭은 뻘건 황토와 바위 같은 돌들이 억수로 묻혀있는 상태였다. 이후 3~4년 동안 돌을 캐내고, 이랑을 만드는 작업을 계속했고 그 일은 올해도 계속 되었다. 그 밭에는 콩을 필두로 해서 감자, 배추, 무, 참깨, 고구마, 옥수수, 땅콩, 양파, 마늘, 도라지, 부추, 토란, 생강, 야콘 등등의 작물을 심었다. 그러면서 해를 달리하면서 필요에 따라 혹은 심는 작물의 특성과 밭의 물빠짐을 고려해서 이랑을 새로 만들거나 넓히거나 높이는 작업을 해왔다. 아이들의 똥과 낙엽을 썩혀 만든 퇴비와 아이들의 오줌을 거름으로 쓰고, 작년에는 분교 앞에 농사를 지으시는 장로님께 부탁해서 볏짚을 사서 두둑 멀칭을 하는 등 황토를 작물이 자라기에 좋은 땅으로 만드는 노력을 계속하고 있다. 


자그마한 텃밭에 불과하지만, 밭을 가꾸면서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 그 다음으로 석유를 쓰는 기계, 화학비료, 그리고 살충제와 제초제 등의 농약을 쓰지 않는다 등 내 나름의 원칙을 세워두고 일을 해왔다. 비닐 멀칭을 할까 말까는 아직 선명하게 기준을 잡지 못하고 상황에 따라서 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하고 했다. 기계를 쓰지 않으니, 그동안 이랑을 새로 만들고 돋우고 하는 과정에서 닳고 깨진 쇠스랑이 4개이고 돌을 골라내는 쇠갈퀴와 괭이도 부러지고 망가진 게 한 둘이 아니었다. 아이들의 노고도 적지 않게 들었다. 돌을 캐내고 풀을 뽑고 작물을 수확하고 갈무리하는 데 아이들의 손과 땀이 없었다면 지금 상태의 밭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농사를 지어오면서 매 해 땅에 박히는 쇠스랑과 호미의 손맛이 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비가 오면 뻘처럼 되어 발을 딛고 떼기가 힘들고 물이 빠지면 돌처럼 단단해지던 밭이 이제 두둑을 충분히 높여 물빠짐도 좋게 하고 고랑과 이랑에 풀과 볏짚 등을 깔면서 비온 후에도 걷기에 무리가 없게 되었고, 어떤 곳은 딱히 농기구를 쓰지 않고 손으로 파헤쳐도 부드럽게 들어가는 흙이 되었다. 일단 토양이 이렇게 바뀌자 쇠스랑을 써서 이랑을 만드는 시간도 많이 줄어들었고, 그렇게 만들어진 이랑에 씨를 뿌리고 잡초를 뽑는 일에도 훨씬 적은 힘을 들여서 일을 할 수 있게 되었다. 만 3년간의 밭 만들기 노력이 있은 후 밭일은 아주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게 되었다. 


생각을 좀 더 해본다. 거의 기계적인 동작을 반복하면서 수월하게 씨감자를 놓는 것이 ‘감자 농사’의 핵심적인 과정인 것은 사실이지만, 이 작업을 훨씬 쉽게 해주고 또 감자가 자라면서 필요한 영양소를 충분히 함유하고 있고 뿌리내림을 좋게 할 수 있는 토양으로 만드는 과정 전체가 이전에 선행되었다는 사실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하지 않은가! 그렇다면 아이들과 영문법, 단어, 발음 공부를 하면서, 나는 나의 씨앗 심는 행위가 단순한 손동작 이상의 의미를 갖게 해준 이런 밭 만들기에 상응할만한 ‘삶의 터전’을 가꾸는 노력을 하고 있었던가? 

 

 

 

II.

 

학교를 삶의 터전으로 가꾸기 위한 노력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 노력은 무엇보다도 공부와 일상의 삶의 분리를 극복하는 데 모아져야 한다. 우리의 의식 안에 당연한 것으로 자리하고 있는 교육과 삶, 개인의 역할에 대한 습관화된 인식을 반성적으로 고찰하고 현실의 삶에 유용하게 쓰이는 활용 처를 밝혀 써야 한다.

 

교사는 아이의 삶과 인식의 세계를 더 큰 넓이와 깊이를 갖고 있는 세계와 더 중층적이고 복합적이며 다양한 세상살이의 문으로 안내하고 열어주는 안내자이다. 정신 계발에서 뿐만 아니라 실제 일상생활 속에서의 삶의 동선을 구축하는 데까지, 그리고 나아가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 수 있는 비전을 제시하는 것까지가 교사의 몫일 것이다. 단테(Dante)의 시적 자아를 천국의 문까지 안내하는 버질(Virgil)처럼. 이렇게 할 수 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교사 스스로가 자기 전문 분야(과목)에 정통하는 것이 전제되어야 할 것 같다. 자신이 맡은 과목의 내용을 숙지하고 교과서를 일상으로 연결하고 확장시켜 명쾌하게 설명해 낼 수 있어야 한다. 


학습에 대한 연구도 그렇지만 동시에 끊임없는 자기계발, 변화와 성숙을 위한 노력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교사는 말하자면 ‘공인’이고 그래서 한 교사가 스스로와 타인, 사물과 상황을 대하고 이해하는 태도나 견지 자체는 매우 엄격한 책임의식을 수반하기 때문이다. 동시에 아이들을 만나는 일은 아이 개인의 성품과 생활 습관, 태도와 직면하는 일이면서 동시에 아이의 부모, 아이가 자라온 가정의 분위기나 문화와의 대면이기 때문이다. 교사의 자기 계발 노력은 아이의 개별적 특성을 가정환경을 이해하고 그에 기초해서 적절하고 유연하게 대응할 수 있는 여유와 힘을 키워준다.


학교에서는 근본적으로 일—공부—생활을 일관된 원리로 묶어내면서 동시에 다양한 생활 언어로 풀어내는 교육이 이뤄져야 한다. 비록 현행 교과 구분을 받아들이고 있는 상황에서 모든 과목의 내용을 이런 식으로 일상생활의 면면과 하나하나 대응해서 연결시키기는 힘들 것이다. 그러나 책에 인쇄된 지식 정보는 단순히 암기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활용되고 일상과의 접점을 갖게 되면서 비로소 이해의 문이 열리게 된다. 아이는 공부의 내용이 아이 자신의 생활과 직접 연결되어 있고 그래서 공부가 자신의 일상에 도움이 되는 것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인도하고 이런 식으로 이해하는 방법을 찾게 해야 한다. 


지식은 그 자체의 중요성이나 심오함이 아니라 그것을 받아들이는 아이의 마음가짐과 정신적 신체적 발달 상태, 아이가 자라는 환경을 고려하여 아이의 삶에 유익하고, 아이의 행복과 즐거움을 더하는 데 활용되어야 한다. 현실적인 연결 고리를 상실한 진공상태의 실험실적인 조건에서 제공되는 지식 정보는 소수의 아이들에게는 지적 유희를 선물하겠지만 다른 대부분의 아이들에게 정신적, 신체적 부담만을 안겨주기 쉬울 테니까. 여기서 주의할 점은 그것이 생활에 도움이 되어야 한다는 식으로만 받아들이면 안 된다는 것이다. 그보다는 공부가 아이에게 즐거움을 주고 아이의 자존심을 높여주는 계기로 되어야 한다고 말하는 게 좋을 것이다. 정보의 습득에 있어서 양보다 질적·정서적 수용과 이해의 측면이 더 중요하게 작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또 하나 중요한 지점은 아이의 교육에 학교와 가정이 함께 하는 것이다. 학교에서 교사의 역할과 책임만큼 가정에서 부모의 역할과 책임도 똑같이 중요하다. 가정과 학교 모두에서 가능하면 일관된 지도 원리와 방침에 따라 아이가 생활하고 공부할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가정은 인생관/가치관 정립의 근거지이면서 동시에 실현지다. 가정에서의 올바르고 적절한 생활습관 교육은 아이의 인생관이나 가치관뿐만 아니라, 공부습관이나 공부에 대한 태도 형성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가정에서도 생활(일)과 공부가 이뤄져야 하고 학교에서도 생활(일)과 공부가 이뤄져야 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사실이다. 그런데 가정과 학교, 생활과 공부의 ‘기능적’ 분리·고착 현상은 실질적으로 아이들의 가치관 정립, 올바른 생활/공부 습관들이기를 어렵게 하고 있다. 


가정에서는 생활지도와 생활 문화의 재생산이 불가능하거나 무의미해졌고, 학교는 학교대로 아이의 생활지도와 학습 둘 다에서 중심 역할을 거의 하지 못하고 학원에 그 역할을 내맡기고 있는 현실이다. 학교는 방만한 가정과 전투적인 학원 사이에서 그 존재 이유를 정립하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아이들을 순위 매기고 줄 세우는 사회의 공적 대리기관의 하나로 자리 잡았고, 저질 사회문화의 대물림이 만연한 공간이 되어버렸다. 가정은? 우리 시대에 가정 고유의 가치나 전통이 모색되고 ‘전승’되는 것까지는 바라지 않더라도, 가족 성원들 사이에 어떤 의미 있는 대화와 소통, 관계 형성이 일어나는가? 학교가 공부만 하는 곳이 아닌 아이의 전인격적 성숙을 도모하는 교육의 장이듯, 일상적인 가정생활 또한 지극히 중요한 교육의 장이다. 


학교와 사회(가정)이 어떤 세계관을 추구하는가, 어떤 식의 협력적 관계를 견지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아이에 교육에 대한 우리(사회)의 세계인식과 인간 이해의 수준을 가늠케 하는 준거이다. 이미 가정, 사회, 학교 사이에 얽히고설킨 복잡한 문제 상황이 있는데, 학교 혹은 가정 하나만을 붙잡고 그러니까 공부와 생활을 따로 분리하거나 둘 중 하나를 아예 무시한 채 아이에게 공부, 혹은 운동만 하라고 하는 태도는 처음부터 잘못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공부든 운동이든 아이의 심신의 건강과 안정, 변화와 성장을 핵심에 두고 그것을 잘 해내기 위한 방법을 모색해야만 한다. 


우리는 부모로서 또 어른으로서 어떤 지향과 삶의 태도를 견지할 것인가, 아이와 어떤 관계를 맺을 것인가, 아이와 어떤 대화를 나눌 것인가, 아이에게 부모의 책임을 다하는 반응을 하고 있는가, 아이들을 위해서 어떤 가족 문화를 만들어 볼 것인가, 또 어떤 사회를 만들어가야 할 것인가를 끊임없이 물어야 한다. 

 

 


 

III.


교육은 밭을 돌보고 씨앗을 심어 가꾸는 것과 같다는 생각이 든다. 아이는 씨앗과 같다. 이미 발아와 성장과 결실의 전 과정이 온전히 담겨져 있는, 그 자체로 완전한 가능태로써의 씨앗 말이다. 싹트고 성장하고 꽃피어 열매 맺는 전 과정은 그 자체로 자연이다. 그것은 자연스럽게 또 필연적으로 일어난다. 모양을 다듬기위해 나무 가지를 자르거나 철사를 감아서 원하는 모양으로 구부리는 식으로 해서는 나무 자체의 본래 수형이나 크기가 온전하게 펼쳐낼 수 없게 만든다. 기르는 사람 자기 취향에 맞춰 기른 나머지 의존성이 강화되고 계속해서 보살피고 가꿔주는 손길이 있어야만 살 수 있게 된다. 살아 있되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교사로서, 부모로서, 우리가 잘 할 수 있는 일은 씨앗이 잘 싹트고 자랄 수 있는 조건을 구성해주는 것이 아닐까. 어떻게? 가정, 학교, 사회가 아이들로 하여금 적절한 가치관, 생활태도, 인간관계 기술을 익힐 수 있는 ‘선한 생활 문화’를 일상 속에서 구현해 내는 것을 통해서일 것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아이에게 좋은 삶, 의미 있는 삶이 무엇인지에 대한 상식적인 합의, 그런 식의 사회적 합의가 일어나는 과정·절차를 조직하고 견지해가는 연습을 시켜가는 것이기도 하다. 좀 더 범위를 좁혀서 말하자면, 학교를 아이와 부모 교사가 함께 하는 하나의 교육 공동체로 만들어 가는 일이 될 것이다. 좋은 토양을 가진 밭에 씨앗을 뿌리면 씨앗은 틀림없이 잘 싹터서 깊이 뿌리 내리고 아름다운 꽃을 피우고 실한 열매를 맺는다. 


아이의 몸과 마음이 자라는 과정 그리고 학습과 배움이 일어나고 이뤄지는 내밀하고 복합적인 심리학적 원리를 잘 이해하고, 아이 자신의 타고난 가능성과 생명의 존엄성과 삶의 의미에 대해 깊이 성찰할 필요가 있다. 아이들의 생활환경과 교육환경—좁게는 가정, 학교, 또래관계 등이고 넓게는 우리사회와 세계사적인 흐름까지 포함하는—을 개선하고, 아이들이 마음 편히 즐겁게 놀고 공부하며 스스로를 펼치고 표현할 수 있는 풍토와 문화를 가꿔내야 한다. 아이들이 또래 집단 속에서, 선후배들 사이에서, 가족 성원들 사이에서 긴밀한 유대를 실감하면서 그 속에서 스스로의 소중함을 깨닫고 홀로 설 수 있는 자신감을 얻어낼 수 있을 때 배움은 편안하게 온전히 일어날 수 있다. 


아이들에게 공부라는 것이 일상 속에서 그 효율성이 확인되고 스스로에게 이로움을 주며, 자존감을 높이는 구체적인 일이나 과제로 제시되는 일, 아이들이 충분히 안정되고 평화로운 관계 속에서 자신감을 갖고 자신을 드러내고 주변 사람들과 만날 수 있는 문화를 만들어 내는 일은 결코 쉽지 않은 도전 과제이다. 그러나 이런 노력을 하지 않는다면 아이가 하는 공부와 일, 학교생활 전체는 무의미한 시간 낭비라는 비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아니, 우리는 자칫 자기 밭에 심은 작물이 빨리 자라나 열매 맺기를 바라면서 얼른 크라고 어린 싹을 잡아당겨주었다가 다 죽이고 말았던 옛 이야기 속 어리석은 농부가 저지른 무지한 행위를 반복하게 할 것이다. 


씨알 한 알을 심기 위해서 밭 전체를 돌보고 가꾸는 것처럼, 아이를 가르치기 위해서는 우리의 삶의 구조 전체를 조망할 수 있어야 한다. 학교 수업과 다른 일상 속의 일들 사이에 쳐둔 울타리를 없애야 한다. 작물을 심어서 날 소출이 얼마나 될지를 생각하면서 욕심을 앞세우면 마음은 무거워지고 일은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아이에게 공부라는 것은 삶의 전체 내용 중의 일부일 뿐이라는 점을 알려주고, 다른 선택의 장이 있음을 알려줄 수 있어야 한다. 교사로서든, 부모로서든, 학생으로서든, 종국에 가서는 존재와 생명의 원리에 대한 이해와 삶 전체에 대한 전망을 놓치지 않는 것이 필생의 과업이 될 것이다. 





날짜

2013. 12. 16. 10: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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