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개월만에 '생각의 과잉이 빚어낸 가상세계1'에 이어 씁니다. 너무 시간이 떠서 제대로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ㅠㅠ 

 


 

생각의 과잉이 빚어낸 가상세계 2

 

- 금안당

 

 


하지만 그렇다고 분별지의 세상이 무조건 허구나 가상의 세계로 내쳐져야 하거나 잘못된 것으로 치부되어야 하는 건 아니다. 아마 인간이 이 분별지의 세상을 평가절하하거나 무시한다면, 인간은 살아야 할 이유를 찾지 못할 것이다.

 

윤회를 인정하는 세계관들 중에는 인간이 이승에 태어나게 된 건 그 영혼 스스로가 선택했기 때문이라고 보는 입장들도 있다. 이 입장들에 따르면 지금 세상을 살아가고 있는 모든 사람은 자신의 영적 자유를 희생하여 육신 속에 갇힌 존재로서 일종의 아비규환 같은 인간 세상에 태어나기로 스스로 선택했다.

 

그렇다면 왜 사람들은 그런 어리석은, 혹은 끔찍한 선택을 했을까? 아마도 혼돈의 세상이 아닌 형상의 세상에 살아보는 것이 그 영혼의 성장에 중요한 의미가 있어서가 아닐까? 그래서 그 모든 부자유와 고통과 상처의 위험을 감수하고서라도 이승에 태어나기로 선택한 것이 아닐까?

 

이는 정반대 상황과 비교해보면 명확해진다. 예를 들어 어떤 사람을 한 점 티끌도 없이 환한 하얀 방에 몇 주를 가둬두면 어떻게 될까? 반대로 햇빛 한 점 들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의 방에 가둬두면? 아마도 며칠 안 가 미치고 말 것이다. 어떤 형상도 분별이 되지 않을 것이며, 앞으로도 계속 이런 환경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면, 그는 살아갈 이유가 없어질 것이다.

 

요컨대 사람에게는, 그리고 생명들에게는 이 유의 세상, 분별지로 가득한 이 유의 세상이 충분히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에게 존재 이유를 준다는 것이다. 그리고 신(창조주)은 지극히 자애로워서 온갖 형상의 창조물들로 넘쳐나는 풍요로운 유의 우주(자연)를 우리에게 주었다. 수백, 수천번의 생애를 들여 탐구해도  절대 그 비밀을 다 밝힐 수 없을 만큼 신비롭고 오묘한 세상을 말이다. 그러니 인생이 뻔하다느니, 지겹다느니, 혹은 내가 제일 잘 아니 내가 옳아, 라는 생각은 그냥 철 없는 인간의 오만방자함에 지나지 않는다.

 

따라서 비록 유의 세계가 "분석과 분별 이전의 통체적 세계, 진정한 세계상"인 '혼돈'이나 '무'보다는 덜 근원적일지 몰라도, 인간의 생각이 자가발전하여 빚어낸 2차적 세계 혹은 가상세계보다는 훨씬 더 진리에 가깝다는 것 또한 분명하다. (아마도 이 유의 세계를 '자연'이란 용어로 바꾸면 훨씬 더 이해하기가 쉬울 것이다.) 그리고 물질형상을 한 인간은 이 유의 세계, 즉 자연을 통해서 진리를 추구할 수밖에 없다.

 

북미 원주민인 인디언들이 자연의 이치에 맞지 않게 인간 세상이 발전하는 것을 가능한 저지하고, 자연과 밀착된 삶을 유지하려고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그들은 자연을 이해함으로써만 진리에 다가갈 수 있고, 우리의 영혼을 성장시킬 수 있는 진정한 삶을 살 수 있다고 보았다. 이 때문에 대다수의 북미 인디언들은 문자를 발명하지 않았으며, 재산을 상속하지 않음으로써 사회계급을 만들지 않았고, 도시를 발달시키지 않았다.  그리고 철저히 자연과 더불어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생활했다. 

 

반면에 지금은 정말 극소수로만 존재하는 소수민족, 혹은 소수부족민을 제외한 나머지 인류는 인간세계, 인위적 세상을 점점 더 확장시켜 자연을 '정복하는' 다른 방식의 삶을 살아왔다.  예를 들어 인간의 밞명품인 '문자'를 보자. '글'은 '말'에서 나왔지만, '글자'라는 형식을 취하면서 '말'과는 다른 발전메카니즘을 가져왔다. 물론 글 중에도 말과 흡사한 구어체라는 게 있지만, 대다수의 글은 자기 역할에 충실할 수 있도록 문어체 형식을 취한다. 조사해보지는 않았지만, 말만 사용하던 때와는 달리 글자가 생기고 나서 인간은 엄청나게 많은 새로운 어휘를 갖게 되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렇게 실생활에서 분리된 언어가 전하는 진리는 어느 정도일까? 아니, 통계적으로 봤을 때 말이 더 진실될까? 글이 더 진실될까? 사실 말로도 얼마든지 거짓말을 할 수 있다. 그래서 흔히 그 말이 거짓인지 아닌지 판단하려면 말을 액면 그대로 듣지 말고, 말하는 사람의 눈을 봐야 한다고도 한다. 그렇다면 말하는 사람의 눈을 직접 확인할 수도 없는 글의 경우는?

 

그런데도 현대사회는 당사자의 눈빛이나 말이 아니라 글이 적힌 문서만을 유일한 근거자료나 증거로 삼는 경우들이 많다. 물증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가 흔히 보듯이 공문서나 보고서 내용의 많은 부분은 사실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것이 아닌 그냥 '말'일 뿐이다. 공문서나 보고서에 적힌 인삿말을 보고 정말 친근하게 안부를 묻는다고 여기는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데도 얼마나 많은 공무원들과 사무직들이 열 문장이면 전달될 사실을 전달하기 위해 수십장, 심지어는 책 한 권 분량의 문서를 작성하고 있는가?  인간의 발명품이 발명자의 손을 벗어나 자가 발전을 하면서 도리어 인간을 휘두르게 된 한 예라 할 것이다.

 

아, 물론 말이 아닌 글이 전달수단이 될 때 갖는 장점과 쓸모를 부정하는 건 아니다. 또 글을 가지고서도 얼마든지 인간적인 교류가 이루어질 수 있다는 걸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고기능의 복잡한 연장을 정말로 제 몸처럼 잘 쓸려면 상당 수준의 전문가가 필요한 것처럼, 글 또한 본래의 목적인 인간적인 교류를 충분히 소화하려면 글쓰기를 전문으로 하는 작가 정도의 수준이 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문명(인위적인 세상)의 발달은 동전의 양면처럼 언제나 장단점이 있다. 차이는 문명을 발달시키지 않은 인디언 사회는 장점보다는 단점이 더 크다고 본 반면, 나머지 대다수 사회는 단점보다는 장점을 더 높게 평가한 것이라 할 수 있다.  하지만 문명이 발달할수록 물질세계가 발달하고, 그 문명에 속한 사람들은 그 물질세계를 습득하느라고 더 바빠지고 더 여유가 없어진 것 또한 사실이다. 게다가 인간이 관심을 가지고 탐구하는 세상의 범위도 문명의 틀 내로 한정되는 경우가 많아졌다. 그리고 이렇게 자연계의 일부로 범위가 좁아진 만큼, 그 협소해짐을 보상이라도 하듯이 가상세계의 층이 두터워졌다.

 

사실 문명의 발전으로 말하면, 완전히 사라져 전설로만 남아 있는 문명을 제외하고 그 이전의 어떤 문명도 자본주의 문명만큼 발달하지 못했다. 반면에 자본주의 문명만큼 편협한 문명도 없다. 자본주의하에서는 인간의 생산활동이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는 홍익인간 관점이 아니라, 팔아서 돈으로 만들 수 있는 생산물인가 아닌가에 주로 좌우된다. 과학 기술과 발명, 발견조차 상용화할 수 있는가 아닌가에 크게 좌우된다.(대자본가들이 사람들에게 무료로 전기를 공급할 수 있는 테슬러의 무선 전력 방식이 아니라 돈을 받을 수 있는 에디슨의 유선 전력 방식을 택한 것이 그 대표적 사례이다.)

 

정치 또한 민주주의라고 하지만, 권력을 잡으려면 일단 국민의 표를 얻어야 하므로, 정말 국익을 위한 정치나 장기적인 관점의 정책보다는 대중영합적이거나 대국민사기극 같은 정책이 시행되는 경우도 많다. 또 사회문화적으로도 가족을 제외하고는 서로 경쟁하고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다 보니, 모든 사람이 방어를 위해 불필요한 에너지와 노력을 낭비한다. 말하자면 정작 구성원에게는 아무 도움도 안 되는 사회적 낭비가 극심한 것이다.

 

예전에 텔레비젼에서 '종말을 준비하는 사람들'이라는 다큐를 본 적이 있다. 그들은 앞으로 펼쳐질 수 있는 미래의 무수한 가능성 중에서 '지구 종말'의 가능성이 실제로 가능한 유일한 현실이라고 판단하고, 지금의 삶 전부를 그것에 대비하는 데 바치고 있었다. 누구도 미래를 정확하게 예견할 수는 없으니, 그들이 틀렸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그들의 판단과 그에 따른 미래 대비에 소위 말하는 '망상'이 엄청난 부분을 차지하고 있음은 분명해보였다. 그리고 이들이 컴퓨터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님에도, 이들은 완벽하게 '가상세계' 속에서 살고 있었다.

 

이처럼 가상세계는 우리 머릿 속에만 존재하는 세계가 아니다. 우리 인간은 머릿 속에 그리는 가상세계를 현실에 펼쳐낼 능력이 있다. 예를 들어 미모에 너무 관심이 많은 여성은 성형수술 등으로 자신의 얼굴을 '아름답게'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그 다음에는 바뀐 얼굴이 현실이 된다. 앞으로 몇 십년 후에는 아름다워지고 싶은 여성의 욕구만이 아니라 슈퍼맨이 되고 싶은 남성들의 욕구도 반영하여, 사람들은 자신의 사지를 인조수족으로 바꿀지도 모른다. 이 경우에도 가상세계가 현실로 바뀐다.

 

경제가 무엇보다 중요한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돈이 만들어낸 가상 세계의 비중이 막강하다. 실물가치의 반영이었던 태환화폐가 불환화폐로 바뀌게 된 것은 세계대공황 이후인 1920년대이다. 이 때부터 화폐의 중심은 지폐로 옮아갔고, 지폐는 새끼를 쳐서 수표, 주식, 선물, 채권, 카드, 모기지 등의 금융상품들을 낳았다. 이 모두가 실물경제의 극히 일부분만을 반영하는 가상 세계의 화폐들이다. 그러니까 돈의 막강한 힘에 지배당해 살고 있는 현대인들은 실제 현실세계에 사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발 한쪽은 가상세계에 담근 채 살고 있다. 현대 사회가 너무 경제만 중시하고, 경제만 발전시킨 탓이다. 말하자면 경제와 관련한 생각의 과잉이 이렇게 현실화한 가상세계를 펼쳐놓은 것이다.

 

문제는 설사 현실화한 것이라 해도 가상세계는 모래성처럼 무너지기 쉽다는 것이다. 자연재해이든, 인재인 금융공황이든, 재난이 발생하면 가장 먼저 무너지는 건 가상세계이다. 남는 건 종이조각뿐이다. 이는 자연미인보다 성형미인이 외부의 시선에 더 취약하고, 면역력에 있어서도 더 위험한 것과 같은 이치이다. 왜냐하면 가상세계는 머릿속의 생각에 그 뿌리를 두고 있기 때문이다.

 

가상세계란 한 사람의 머릿속 생각이 다수의 생각이 되어 만들어진 세계, 무에서 유로 창조된 세계이다. 그런데 생각이란 건 쉽게 바뀔 수 있다. 그것이 다수의 생각이라도 말이다. 예를 들어 어떤 나라에서 발행된 채권이 있다고 해보자. 다수의 사람들이 이 나라의 발전가능성을 긍정적인 것으로 보고, 다시 말해 채권 회수가 확실하리라 여기고 채권을 거래하는 동안에는 그 채권이 가치 있다. 그런데 그 나라의 재정 조짐이 좋지 않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사람들은 채권 결재가 불가능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 순식간에 채권의 가치가 하락한다. 물론 그 채권이 한 푼의 가치도 없는 종이조각이 되는 것은 그 나라가 모라토리움을 선언하는 순간이 되겠지만, 아직 실제적인 결과가 벌어지지 않은 상황에서도 채권은 사람들의 생각 변화에 따라 가치가 요동친다. 그 나라의 실물경제가 화재로 다 타서 없어진 것도 아닌 다음에야 실물경제는 그대로인데 말이다.

 

그래서 가상세계를 들여다보고 있으면, 사람들이 삶을 사는 게 아니라 게임을 하는 것 같아보인다. 위 채권의 사례도 아마도 그냥 가치가 하락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사람들이 '폭탄돌리기' 같은 게임을 하면서 그 채권을 무효화시키는 과정을 밟을 것이다. 그리고 이렇게 게임이 진행되는 동안, 어떤 식으로든 가상세계는 더 커지고 진짜 현실에서 더 멀어진다. 그러고 보면 경제학 이론 중에 경제현상이 그 사회 구성원들의 심리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다고 보는 이론이 일리가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현상을 달리 말하면 버블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다. 부동산 버블도 주택이나 토지의 실제 사용가치나 심지어 정상적인 교환가치보다 훨씬 더 높게 가격이 설정되는 현상을 말한다. 반면에 정상적인 가치보다 가격이 폭락하는 건 버블이 터지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고 버블 현상이 굳이 경제 분야에서만 발생하는 건 아니다. 현실과의 괴리 혹은 현실 왜곡 현상인 버블 현상, 가상세계는 정치 영역이나 사회, 문화 영역에서도 발생할 수 있고, 심지어는 객관성이 생명인 관료 조직이나 법적 영역에서도 발생할 수 있다.

 

사회 각 영역에서 이런 버블 현상이 발생하는 건 인위성, 그 중에서도 대중심리가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마치 다리 위를 행진하는 군대가 만들어내는 공명현상과 유사하다. 200명이 한꺼번에 건너도 끄떡 없는 다리가 있다. 그런데 200명의 군인이 보조를 맞추어 발을 쾅쾅 울리면서 다리 위를 행진하기 시작하면 그 무심하게 태연하던 다리가 흔들리고 진동하기 시작한다. 다리 위에 서 있던 다른 사람들은 위태로움을 느끼고, 다리 위를 행진하는 군인들은 좀더 더 박차를 가하면 다리를 무너뜨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예감에 더욱더 발을 굴린다.

 

그러니까 가상세계는 일종의 집단행동이다. 물론 개개인의 가상세계, 상상의 세계도 존재할 수 있지만, 증폭되는 과정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개개인의 가상세계의 거품은 쉽게 터지고 만다. 가상세계가 강력하게 유지, 확대되기 위해서는 대중 심리에서 기인하는 대중 행동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대중 심리와 대중 행동으로 말하면, 대량 생산과 대량 소비를 근간으로 하는 자본주의 사회의 탄생은 그야말로 이를 위한 확실한 온상을 제공했고, 지금도 그 추세는 굴러가는 눈덩이처럼 커져가고만 힜다.

 

요약하면, 자연으로 대표되는 유의 세계, 분별지의 세상이 근원적인 진리에서 한 단계 이탈한 건 사실이지만, 물질형상을 하고 현세를 살아가는 인간에게는 근원 진리를 찾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이자 우리의 존재이유라는 점에서 충분히 유의미하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의 순리)과 자신을 일치시키려는 의지를 중단할 때, 그리하여 현실의 일부에만 초점을 맞추고 편협해질 때, 주관성이 확대되어 과대망상이 발전할 때, 그리고 이 현상이 집단적으로 이루어질 때, 가상세계가 발전하고, 우리는 더욱더 진리에서 멀어져 '제정신이 아닌 세상'을 펼쳐보인다.

 

가상세계가 발달할수록  해당 문명은 위태로워지고, 망상과 집착에 사로잡힐수록 개인의 정신세계는 붕괴 위험이 크다. 문명과 정신세계의 붕괴를 막을 한 가지 방법은 편협함에서 벗어나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열려 있는 것이다.

 

2013. 12. 23.


날짜

2013. 12. 23. 0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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