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순간들 2

- 금안당 



자신에게 맞는 최선의 선택은 이념적,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라든가, 자신의 욕심이나 욕구를 채워준다거나(이렇게 되면 감정적 쾌락이 동반된다) 하는 것과는 관계가 없다. 심지어 자신에게 맞는 최선의 선택은 논리적 타당성과도 관계가 없다. 일국의 왕자로 태어난 싯다르타가 약속된 그 모든 부귀영화를 팽개치고, 젊은 아내와 자식까지 버리고 왕궁에서 뛰쳐나와 자진해서 고행의 길로 들어선 그 행위는 도덕적인 건 물론이고 생물학적 생존본능과 논리적 타당성에도 어긋나는,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는 '미친짓'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우리는 싯다르타 왕자의 그 선택이 자신을 석가모니 부처로 다시 태어나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전 인류에게 무한한 도움을 준 선택이었음을 잘 알고 있다. 

 

그럼에도 당신이나 내가 싯다르타 왕자의 길을 따를 필요는 없다. 당신이나 내가 현생에 이 세상에 태어난 이유는 싯다르타 왕자의 그것과는 다르다. 이 점을 확실히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만 우리는 자신의 길을 갈 수 있다. 다만 우리가 석가모니 부처(예수 그리스도의 경우도 마찬가지지만)에게서 배울 점은 그가 그 모든 세속의 관점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또 용기 있게 자신의 길을 선택했다는 데 있다.

 

그렇다면 싯다르타가 그 길을 선택하지 않음으로써 석가모니 부처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혹은 나사렛 예수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을까? 이미 일어난 과거사를 가정법으로 하는 게 무의미할 수도 있지만, 이 물음에 대한 답의 차이는 우리가 삶의 바라보는 관점의 결정적 차이를 내포한다. 이 물음에 대해 No라고 답한다면, 다시 말해 싯다르타는 석가모니 부처가, 나사렛 예수는 예수 그리스도가 되는 게 필연이었다고 답한다면, 그 사람은 운명론자 혹은 필연론자의 입장이다. 이런 입장이라면 내가 이 글에서 말하는 '선택'이란 걸 대단히 제한적인 의미로만 받아들일 것이다. 반대로 Yes라고 답한다면, 말하자면 그러지 않을 수도 있었다고 보는 사람은 인간의 자유의지의 표현인 '선택'에 중차대한 의무 부여를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물론 석가모니나 예수님 같이 높은 영성을 가진 영혼이라면, 우리 같이 평범한 일반인들보다는 자신에게 최선의 선택을 했을 가능성이 훨씬 더 많은 건 말할 것도 없다. 반면에 우리처럼 영성의 수준이 그리 높지 않은 사람들은 정말로 '깨어 있지 않으면'(혹은 속된 말로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지 않으면) 최선의 선택을 놓칠 가능성이 오히려 많다. 하지만 최선의 선택을 할 가능성이 아무리 많다고 해도 누구도 '반드시'는 아닌 법이다.]

 

그러니 어떤 영혼도 기득권을 갖지 않는다. 그냥 각자의 영혼이 성장하는 각자의 길이 있을 뿐이고, 영혼이 답보하거나 퇴보하지 않고 성장하는 건 어떤 영혼에게나 절대 손쉽지 않은 과정이란 사실이 있을 뿐이다.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건 각자의 길이 있다는 점이다. 우리는 누구를 흉내내거나 모방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난 것이 아니다. 비록 위대한 성인이나 현자에게 본 받을 것이 있고, 따를 점이 있다 하더라도 모방하거나 흉내내는 건 내 삶을 자유의지로 선택하는 과정이 아니다.

 

이는 외모가 아름다운 여자가 있을 때, 내가 그녀를 흉내내어 똑같이 화장하고 똑같이 멋진 옷을 입고 심지어는 성형으로 똑같은 얼굴, 똑같은 몸매를 갖는다 해도 내가 그녀가 되지는 못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흉내내고 모방할수록 오히려 내 삶만 망가진다. 그러니 되도록 후회하지 않을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삶을 살려고 한다면,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에게서 출발해야 한다.

 

두번째로-- 첫번째 동전의 이면일 수도 있지만, 아무도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기에--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남을 의식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어릴 때는 부모 혹은 보호자를 의식하고, 청소년기부터 청년기까지는 친구나 동료를 의식하고, 가정을 이루고서부터는 배우자 혹은 자식을 의식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남을 의식한 선택을 하는 걸, 선택에 책임지는 태도라고 착각한다.

 

예를 들어 어릴 때, 우리는 부모에게 예쁨 받고 싶어한다. 그래서 부모 말을 잘 듣는다. 하지만 부모 말 중에는 인생 선배로서 우리에게 도움되는 지시나 요구도 있지만, 그냥 부모의 욕심이고, 바람인 것들도 많다. 예를 들어 아이는 친구들과 뛰어놀고 싶지만, 부모는 그 시간에 아이가 공부하기를 바란다. 아이가 노는 쪽을 선택하면, 부모는 아이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란 생각을 불어넣는다. 심지어 아이의 선택 때문에 부모가 상처 받은 듯이 군다. 그 다음부터 아이는 홀가분한 마음으로 노는 쪽을 선택할 수 없다. 자신의 선택이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준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렇게 되면 아이는 다음 번 선택 때 부모를 의식한 선택을 하지 않을 수 없다. 아이로서는 자신의 그런 선택 때문에 부모가 피해를 입은 것이 아니고, 아이의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 부모 자신의 태도가 부모 스스로에게 그런 피해를 입혔을 뿐이란 걸 이해할 도리가 없다.

 

보다시피 우리나라 문화가 자신을 중심에 둔 선택이 아니라 남을 의식한 선택을 부추기는 경향이 있다. 소위 cool하지 못해서이다. '내 문제'와 '네 문제'를 구별하지 못해서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우만 그런 건 아니다. <교사 역할 훈련>이라는 책을 쓴 토마스 고든도 교실 안에서 제대로 된 교수-학습 활동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교사가 '학생이 해결해야 할 문제'와 '교사가 해결해야 할 문제'를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학생의 감정 상태는, 그것이 교사의 행동이 계기가 된 감정이고 학생 자신의 학습을 방해하는 요소라고 해도, 대부분 학생 스스로가 해결해야 할 문제인 반면,  다른 아이의 수업을 방해하는 구체적으로 표현된 학생의 행동은 교실에서 교사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교사는 아이의 분노나 흥분을 해소할 수는 없어도, 수업에 방해가 되는 행동을 제지할 수는 있다. 사실 교사가 아이의 감정 상태를 바꾸려는 건 가능하지도 않을 뿐 아니라, 아이의 입장에서 보면 월권 행위이다.

 

부모와 아이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부모가 자신의 욕구나 감정을 빌미로 아이를 조작하려 하는 것은 아이의 자율성을 훼손하는 결과를 가져온다. 사실 아이가 공부를 하지 않고 놀기만 해서 부모가 불안감과 걱정을 느낀다면, 그건 아이의 문제가 아니라 부모의 문제이다. 혹은 B라는 친구가 함께 놀아주지 않아서 A가 섭섭함과 소외감을 느낀다면, 그건 B의 잘못이 아니라, A가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 그리고 그 해결책은 B에게 놀아달라고 부탁하는 데 있지 않고, A 스스로 불필요한 섭섭함과 소외감을 털어버리는 데 있다. 왜냐하면 B라는 개인에게 감정이나 행동을 강요할 수는 없는 법이니까 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관계에서 특정 문제가 누구의 것이고, 누가 해결해야 하는지 잘 구분하지 못한다. 아이를 자신의 소유물로 인식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일수록, 또 아이의 감정 상태에 세세하게 개입하는 부모 밑에서 자란 사람일수록 이 면에서 혼란을 겪을 가능성이 크다. 이런 사람들은 선택 능력, 혹은 선택의 자율성 면에서 덫에 걸려 있다. 사춘기나 성인이 되었을 때 겪게 되는 생리적 환경적 변화는 이 덫에서 빠져나올 기회가 될 수도 있고, 이중 삼중의 덫에 걸리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즉 자신을 중심에 둔 선택은 온데간데 없고, 이제는 부모만이 아니라 동료들과 배우자, 자식까지 의식하면서 선택을 하려니, 기실 선택의 여지란 게 거의 없어지고 마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남을 의식한 선택을 하는 건 좋게 말해서 우리 마음이 여려서이다.(혹은 용기가 없어서이다.) 우리는 '몰인정한 인간'이니, '자기밖에 모르는 인간'이니, '냉혈한'이니 하는 소리를 듣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리고 자신을 다른 사람의 감정까지 배려해주는 '착한 사람', '착한 여자'로 인정받고 싶어한다.(알겠지만 착한 여자 콤플렉스란 게 실제로 있다.) 그리고 이렇게 '착한' 사람이고 싶어하는 건 그 사람이 실제로 착해서가 아니다. 남들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는 착한 척 해야 하기 때문이다.(물론 의식적인 '~척'이 아니라 무의식적인 '~척"이다.) 혹은 거꾸로 아주 못 되게 구는 방법으로 남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하기도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남들의 인정을 필요로 하는 건 그 사람 스스로가 애정 결핍 상태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는 남의 애정을 충분히 받으면 우리의 애정결핍 상태가 개선되리라고 여기지만, 내가 앞서 쓴 어느 글에선가도 얘기한 것처럼 자신의 애정결핍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밖에 없다. 말하자면 자기 스스로 자신이 얼마나 훌륭하고 멋진 존재인지를 깨닫고 나면, 남의 애정을 구걸할 필요 없이 더 이상 애정결핍 증상에 시달리지 않게 된다. 자기 스스로 자신을 믿으면 된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의 애정 결핍 문제를 해결하는 방법으로 남에게서 애정을 구한다. 그리고 이렇게 되면 애정 결핍 ㅡ> 타인의 인정 필요 ㅡ> 남을 의식한 선택 ㅡ> 자기애(자기 존중감) 부족 심화, 라는 악순환이 완성된다.

 

악순환은 순환 과정이 한 번 완성되면, 고통을 감내하면서 그 순환 사슬을 끊고 돌파하지 않으면 점점 강화되고 고착된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한다'는 말이 있듯이, 현실에서는 악순환의 흡인력이 선순환의 흡인력보다 강하다. 그러고 보면 대다수의 사람들이 자유로운 선택을 갈구하면서도 막상 선택의 순간이 오면 이 사람도 의식하고 저 사람도 의식하고 나아가 세상 여론까지 의식하면서 스스로에게 온갖 멍에를 씌운 다음, "어쩔 수가 없어", 혹은 "내가 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라고 스스로 만든 감옥 속으로 숨고 마는 게 이해가 되지 않는 바도 아니다.

 

사실 우리에게는 우리 스스로 지은 감옥이 있다. 이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무능력하고 무방비인 어린 아이 단계를 거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어린아이였을 때 세상과 부모는 이런이런 상황에서는 이런이런 선택밖에 가능하지 않다고 우리를 세뇌시켰다. 무능력하여 부모에게 전적으로 의지하지 않을 수 없었던 우리는 아무런 판단 없이(우리의 본능에 배치되지 않는 한) 그것들을 받아들여 내재화시켰다. 나중에 머리가 크면서 조금씩 부모와 세상의 주장에 비판적 잣대라는 기준을 들이대어 판단하기 시작했고, 부모와 세상의 판단을 거부하거나 저항하기도 했지만, 이미 무의식 속에 내재화된 것은 쉽사리 드러나지 않기에 우리 스스로도 자신이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지, 어떤 트라우마가 있는지, 말하자면 자신의 잠재의식이 어떠한지 모르는 경우가 많다.

 

자신도 모르는 이 잠재의식이 무의식적으로 우리의 선택을 제한하고, 우리의 자유의지를 억누른다. 서머힐의 닐은 아이들에게 가능한 최대한의 자유를 보장함으로써 아이들이 이 잠재의식에 걸려 있는 자유의 한계를 떨쳐버릴 수 있게 도왔다. 성장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자유로운 환경이 보장되면, 아이들은 온전히 자기 자신으로 되돌아갈 수 있다. 반면에 어릴 때 이런 자유로운 환경을 경험하지 못하는 다수의 사람들은 성인이 되어 드디어 자신의 자유의지로 뭔가를 선택할 수 있을 때가 와도 자신이 원하는 게 뭔지를 인식하지 못한다.

 

닐은 아이들에게 자유롭게 선택하도록 놔두면 아이들은 '이기적'인 선택을 한다고 말한다. 아이들이 남을 의식하지 않고 자신을 중심에 놓고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선택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이기적'이란 게 어른들이 생각하듯이, 얄팍한 경제적 이익을 앞세운다는 이야기는 전혀 아니다. 오히려 자기 중심적인 아이들은 뭔가를 해주는 대가로 '돈'을 준다고 해도, 자기가 원하지 않는 건 하지 않는다. 그러니 자유로운 환경이란 아이들이 자신의 진짜 '욕구'를 찾을 수 있게 해준다. 그리고 닐은 이렇게 충분히 '이기적'이어본 사람만이 나중에 진정으로 '이타적'일 수 있다고 말한다. 맞는 말이다.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는 사람만이 다른 사람도 진정으로 사랑할 수 있기 마련이다.

 

반면에 남을 의식한 선택은 자신을 희생한 대가로 남의 애정을 받으리라는 막연한 거래를 하는 것이기 때문에, 자신과 상대방, 어느 쪽에도 도움이 되지 않을 뿐 아니라 둘 다를 불필요한 시험에 들게 한다. 예상과 기대대로 되지 않으면, 자신에 대해서는 그 어리석음을, 상대에 대해서는 그 '인색함'을 비난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남을 의식한 선택을 주로 하면서 사는 사람은 정작 자기 앞에 펼쳐진 자신만의 삶의 행로는 놔두고, 쓸데없이 옆 사람이나 남들의 행로에 관심을 갖고, 그들이 자신을 바라봐주기를 기다리는 사람, '딴짓을 하고 있는 사람'에 다름아니다.

 

그러니 '남들도 그렇게 하니까', 혹은 '우리 부모가, 내 동료들이, 내 친구들이, 우리 동지들이, 내가 존경하는 누구누구가, 우리 목사님 혹은 신부님 혹은 스님이, 우리 선생님이, 내가 좋아하는 연예인이, 자타가 공언하는 그 분야 전문가가, 우리 당 지도자가, 이 사회의 피지배층인 노동자 농민... 등등이 그렇게 하는 게 옳다고 하니' 나도 그렇게 하겠다는 식의 선택을 섣불리 해서는 안 된다. 특히 도덕적 윤리적으로 올바른 선택처럼 보이는 경우일수록 조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도덕적 윤리적 문제일수록 우리의 무의식 속에 남아 있는 비합리적 선입견이 제멋대로 영향력을 미치기가 쉽기 때문이다.

 

오히려 나같은 경우는, '다수 대중이 나처럼 생각한다면 내 견해를 다시 점검해볼 필요가 있다'는 경계심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세상의 진실은 다수 대중의 눈에 쉽게 뜨일 만큼 그렇게 쉽게 자신을 드러내지 않기 때문이다. 혹은 다른 식으로 말하면, 우리 인간의 평균 의식이 아직은 진리를 꿰뚫어볼 만큼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예를 들어 최근에 문제가 된 '세 모녀 자살 사건' 처럼 표면적으로 드러난 사건의 원인에만 주목하고 쉽게 흥분한다. 물론 경제적 곤궁이 그들을 죽음으로 몰아갔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만이 유일한 원인일까? 게다가 20대의 다 큰 두 딸과의 동반자살이라니? 자녀와의 동반자살은 한편으로는 동정심을 불러 일으킬 수도 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살인' 행위이기도 한 게 아닌가?

 

이렇게 문제 상황을 구체적으로 심도 있게 파헤져 들어가면, 진실은 겉으로 보이는 것과는 다른 경우가 많다. 또 그렇게 간단치가 않다. 그래서 대중에게 정보를 주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 대중을 선동하는 걸 자신의 주요 역할로 삼는 언론은 이쯤에서 분석을 멈춘다. 그리고는 자신에게 유리한 메시지만을 대중에게 전달한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소위 말하는 '남비' 현상에 잘 빠지는 건 우리나라 언론의 이런 특성에서 연유하는 바가 크다.

 

대량생산 사회인 자본주의 사회에서 언론은 구성원의 자유에 심대한 영향을 미친다. 누구도 언론이 조성한 지배적인 여론을 거스르기는 쉽지 않다. 현대사회에서 언론은 막강한 권력의 하나이다. 대중의 생각을 조작할 수 있는 수단을 언론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기존 언론들이 대변하는 보수와 진보,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는 의견을 가진 사람은 이 사회의 소수자 혹은 이방인이 되고 만다. 다수의 사람들은 언론이 표방하는 두, 세 가지 입장이 세상에 존재하는 견해의 전부라고 여긴다. 특히 남을 많이 의식하면서 자신의 판단을 선택하는 사람들은 언론이 조장한 여론에 쉽게 휘둘린다.

 

예전에 홍수인지 산불인지 자연재해가 났을 때, 피해를 입은 한 할아버지가 텔레비젼 뉴스의 인터뷰를 한 적이 있다. 다른 피해자들은 자신들의 피해가 얼마나 '억울한' 것인지를 토로했지만, 이 할아버지는 "하늘이 하는 일인데 어쩌겠는가?"라고 담담하게 답변했다. 이후의 관련 뉴스에서 이 할아버지의 인터뷰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았다.  또 자기 손녀를 죽인 가해자를 용서해준 할아버지에 관한 소식도 있었지만, 이 또한 이 사건에 분노하는 다른 여론에 밀려 묻혀버리고 말았다. 언론의 입장에서 보면 이런 경우들은 자신들이 원하는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는 케이스들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언론이 원하는 대로, 개인들이 공격하거나 아니면 그 공격에 분노하거나의 두 가지 행동방식 중에서만(혹은 자기편의 경우에는 감싸주거나) 선택할 수 있다고 하면, 세상이 어떻게 되겠는가?  

 

그러니 세상을 좀이라도 살기 좋은 곳으로 만들기 위해서라도 남을 의식한 선택을 하지 않겠노라고 결심해보자. 물론 당신이 이런 식으로 행동하면, 당신 주위의 사람들이 당신을 왕따 시킬 수도 있고, 또 당신의 선택이 잘못된 것이었다는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하지만 그리 겁먹을 일은 아니다. 자신을 잃는 것보다는 남을 잃는 편이 언제나 더 나은 법이니 말이다.

 

(to be continued)

 



날짜

2014. 4. 7. 07: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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