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순간들 1

- 금안당 



우리는 살면서 무수히 많은 선택을 한다.

우리는 선택을 가지고 우리 인간에게 주어진 자유의지를 표현한다.

 

물론 다른 생물들도 일정 정도의 선택권은 발휘할 수 있다. 하지만 인간만큼은 아니다. 극단적인 예로 자살이나 자해, 가학처럼 생존 본능에 어긋나는 선택까지 할 수 있는 생물종은 인간만이 유일하다. 그래서 인간의 자유의지는 축복이기도 하지만 저주이기도 하다. 사실 대부분의 사람들이 한편에서는 제한 없는 무한한 자유를 갈구하면서도 다른 한편에서는 자신에게 주어진 자유재량, 선택권을 부담스러워 한다.  선택해야 할 게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들은 사소한 문제에 대한 선택이라면 다른 사람이 나를 대신해서 선택해주기를 바란다. 중요한 문제에 대해 선택하고 결정하는 것만으로도 벅차기 때문이다. 반면에 어리석은 사람들은 정작 중요한 문제에 대한 결정권은 남에게 위임해버리고, 사소한 문제들 하나하나를 선택하고 처리하는 데 너무 많은 에너지를 낭비하고 만다. 더 어리석은 사람들은 자신에게 중요한 문제에 대한 선택권은 자신이 없고 겁이 나서 발휘를 못하고, 사소한 문제에 대한 선택권은 게을러서 발휘하지 않는다. 그러면서도  남들과 세상이 자신을 위해 좋은 선택을 내려주지 않았다고 불평한다. 


그런데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 한 가지는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으면, 선택권을 사용하지 않았다고 여긴다는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선택하지 않는 것도 ,  남에게 선택권을 위임한 것도 모두 선택을 한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선택권을 언제나 100% 다 사용하며 살고 있다. 자신이 선택하지 않았다는 판단은 그냥 생각일 뿐이다. 실제로는 선택했음에도 말이다. 


또 하나 사람들이 착각하는 것은 자신이 선택하면 그 결과가 곧 바로 나타날 것이라 여기는 것이다. 하지만 아니다, 지금 눈 앞에서 벌어지는 현실은 내가 이제 막 내린 선택의 결과가 아니라 예전에 내렸던 선택들의 결과물이다. 이제 막 내린 내 선택의 결과는 그 선택을 실현하려면 필요한 또 다른 무수한 선택들의 결과와 함께 미래에 펼쳐질 것이다. 예를 들어 머리 스타일을 바꾸기로 했다고 해보자. 지금 내가 보고 있는 덥수룩하게 긴 머리 스타일은 예전에 내가 내렸던 선택의 결과물이다. 앞머리가  눈을 찌를 정도가 될 때까지 나는 여러 번 미장원에 가는 선택을 미뤘다.  이제 이왕 길어졌으니 머리를 묶기로 했다고 해보자. 그러려면 나는 머리 고무줄을 사야 하고, 앞머리는 핀을 사서 찌르거나 미장원에 가서 다듬어야 한다. 그러니 하나의 선택이 현실화하려면 부속되는 다른 선택들을 실현해야 하고, 그만큼 시간이 걸린다. 그리고 과거의 선택들이 만들어낸 내 현실은 지금의 선택을 위한 현실적 토대가 되었다. 


그런데 가만히 보니 2주쯤 후에 정장을 차려 입고 가야 하는 행사에 참석해야 한다. 묶은 생머리로 갈지, 귀찮지만 미장원에 가서 파마를 할지 다시 생각해봐야 한다. 미장원에 갈 시간을 낼 수 있을지, 행사의 다른 참여자들에게 예의가 아닌 건 아닌지, 그날 입을 정장과 조화로운 건 어느 쪽인지, 등등 선택에 참작해야 할 요소도 많다. 이처럼 머리 모양 하나를 선택하는 걸 놓고도 너무 많은 걸 고려해야 하는데, 이건 선택에는 반드시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선택과 관련해서 사람들이 착각하는 세 번째 측면이 있다. 사람들은 흔히 선택, 즉 자유의지의 행사와 책임이 분리되어 있다고 착각한다. 하지만 아니다, 선택과 책임, 혹은 자유와 책임은 동전의 양면처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더 많이 더 넓게 더 깊게 책임질 수 있는 사람은 그만큼 더 많은 선택권을 가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내가 가진 소중한 뭔가를 잃을 경우까지 책임지겠다는 마음이면, 그 소중한 것을 절대 놓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방어적인 사람보다 더 효과적인 해결책(선택)을 생각해낼 수 있다. 화를 복으로 만드는 전화위복의 선택은 후자보다는 전자의 마음일 때 이루어질 가능성이 훨씬 높다. 용기가 선택과 연결되는 지점이 여기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올바른 선택, 자신과 세상에 유익한 선택을 할 수 있을까? 사실 이건 잘못된 물음이다. 왜냐하면 미래는 아무도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박완서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 나오는 이야기처럼, 6.25가 나기 직전 한쪽은 개성의 집을 팔고 서울의 집을 계약했고, 다른 누군가는 서울의 집을 팔고 개성의 집을 계약한 경우가 있다고 하자. 확실하게 집의 소유권이 넘어오기 전에 전쟁이 터졌고, 게다가 3년 후에 개성은 휴전선에 가로막혀 갈 수 없는 지역이 되고 말았다. 아무도 의도적으로 사기 친 사람은 없지만, 한쪽은 이익을 보고 다른 쪽은 심각한 손해를 입게 되었다. 하지만 선택한 당사자들의 잘잘못은 아니다. 굳이 책임을 따진다면 아무도 예견하지 못했던 전쟁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가 미래를 알 수 없는 한, 또 하나의 선택으로 책임져야 할 모든 상황을 고려할 수는 없는 한, 누구도 항상 올바른 선택, 유익한 선택을 내릴 수는 없는 법이다. 

 

제대로 된 물음은 어떻게 해야 우리가 최선의 선택을 할 수 있는가이다. 자신의 선택이 그 시점에서 내릴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라고 평가할 수 있게 되면, 그 선택으로 인한 결과가 실패라고 하더라도 후회하지 않게 된다. 한참을 살고 나서 자기가 살아온 삶을 후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그 결과에 관계없이 후회하지는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다시 과거로 돌아가도 자신은 예전과 같은 선택을 했을 거라고 하면서... 정말로 후회하지 않는 사람은 과거의 선택 순간에 최선의 선택을 내렸던 사람이다. 물론 누구나 자기 인생을 100% 후회하거나 100% 후회하지 않는 경우는 없다. 하지만 그 두 경우의 비중은 사람마다 다르다.

 

사람들이 원하는 건 자기 삶에서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는 비중이 갈수록 높아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갈수록 지혜로워지고 현명해지기를 원한다. 사실 한 개인의 삶은 그가 내린 선택들이 모여서 구성된다. 선택들이 모여 개인의 삶이라는 작품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이 죽고 나면, 이 세상에 남는 건 명예나 지위, 혹은 부나 자산이 아니라 이제 완결된 이 작품이다. 뒤에 남은 사람들은 그가 남긴 이 작품을 통해 그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의 삶에서 무엇을 본 받거나 어떤 점을 경계해야 할지를 배운다.

 

이렇게 평생에 걸쳐 작품을 만든다는 점에서 우리는 창조행위를 하고 있다. 그리고 이런 창조행위를 하면서 우리의 영혼은 성장하거나 위축된다. 이전의 선택에서 배움을 얻어 더 나은 선택을 하면서 살아갈 때, 우리의 영혼은 성장하고, 똑같은 선택을 반복할 때, 우리의 영혼은 위축된다. 그만큼 선택과 창조는 우리 영혼의 성장에 중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최선의 선택을 하면서 살 수 있을까? 아마도 무엇보다 먼저 자기 자신을 돌아봐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최선인 선택을 하는 것이므로. 다른 사람에게는 다른 선택이 최선의 선택일 수 있다. 나에게 최선의 선택은 다른 사람의 것과는 다르다. (그러니 다른 사람이 나와 똑같은 선택을 하지 않는다고 그를 비난하거나 평가절하할 필요는 없다.)

 

그렇다면 그 선택이 나에게 최선의 선택인지는 어떻게 알 수 있을까?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그건 느낌으로 알 수 있다. 아귀가 맞아떨어지는 느낌, 명료해지고 깔끔해지는 느낌, 그리고 짜릿하고 뿌듯한 충만감... 이런 느낌은 분노, 슬픔, 질투 등과 같은 부정적인 감정과는 거리가 멀다. 그래서 당신이 분노한 상황에서 이와 유사한 느낌을 느낀다면, 그건 내가 말하는 느낌과는 다른 것이다. 내가 말하는 위의 느낌은 모든 부정적 감정들을 놓아버리고 나서야 드는 느낌이다. 최선의 선택을 했을 때 이런 느낌이 드는 이유는 그것이 나의 존재 이유와 부합되기 때문이다.

 

우리 영혼은 뭔가를 경험하기 위해서 육신으로 태어나기를 선택한다. 그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소명이든, 불교에서 말하는 깨달음이든... 혹은 세속적으로 말해 행복이든... 어쨌든 물질적 경험이 아니라 영적 경험을 위해서. 그리고 이런 경험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이 가장 높은 환경을 미리 설계하고 선택한다. 특정한 부모를 택하고, 특정한 신체를 택하고, 특정한 재능을 택하고, 특정한 환경을 택하고... 하지만 이렇게 해도 태어나기 전 그 영혼이 경험하고자 했던 영적 경험을 실제로 할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다.

 

태어나면서 망각을 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태어나면서 우리는 자신이 왜 태어나려고 했는지 잊고 만다. 대신 우리가 태어난 이유와 목적에 대한 세속의 의견들이 부모를 통해서든, 세상 사람을 통해서든, 혹은 자신을 통해서든 쓰나미처럼 우리를 덮친다. 이 때문에 우리는 자주 길을 잃고 만다. 남아 있는 건 실체를 알 수 없는 미묘한 영적 느낌뿐이다. 그래서 우리가 어떤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할 때, 아귀가 딱 들어맞는 느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이 세상에 와서 하려고 했던 바로 그것을 선택하는 것이니 말이다.

 

(to be continued)


 

 

날짜

2014. 3. 30. 08:56

최근 게시글

최근 댓글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