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초중등통합형 대안학교인 파주자유학교 홈페이지에 '그저께'라는 제목으로 게시되었던 글입니다. 함께 생각할 내용이 있다고 여겨져 원저자의 허락을 받고 웹진에 게재합니다. 원저자의 집필 의도를 고려하여 오탈자 외의 글의 내용 및 구조 등은 편집하지 않았습니다. 



우리가 왜 대안학교에서 만났을까요 

- 오동(파주자유학교 초등과정 2,3학년 부모 대표)




그제 통합대표자회의를 했습니다. 

행복한과정 교사와 청미래과정 교사, 각 과정별 학부모 대표들이 모여 학교의 일을 논의하는 자리입니다.

갈등이 있을 것을 예상했기에 갈등의 상황이 있더라도 '갈등'을 피하지 말고 바라보자, 라는 생각을 하고 참석했습니다.  

 

안건은 1.정시모집 결과, 2.청미래 중등과정(8학년)의 진안에서 생활하는 학년의 조정, 3.과정별 아이들에 관한 얘기, 4.체육대회와 대안교육 한마당의 평가였습니다. 





진안에서 생활하는 아이들을 8학년에서 6학년으로 옮기는 문제를 길게 얘기했습니다. 민감한 문제였습니다. 어떤 결정이 옳은지 아직 모릅니다. 해 봐야만 아는 것이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수많은 걱정이 있지만 학교의 결정을 믿는 선에서 합의했습니다. 대안교육 한마당을 평가하면서 잠시 날카로워졌습니다. 아마도 이전에 제가 올린 글이 발단이 되었을 겁니다. 

 

잘 된 부분의 평가는 모두 동의하는 것이니 문제가 없고 비판적인 부분이나 문제점을 바라보는 시선과 생각이 다릅니다. 다르다는 것이 단지 수사의 문제, 표현의 문제라면 쉽겠지만,  관점과 해석의 차원이 다르기에 갈등이 발생합니다. 그제 잠깐 그랬습니다.  





코끼리 다리를 만지는 나와, 코끼리 꼬리를 만지는 당신과, 코끼리의 코를 만지는 그의 경험과 판단은 모두 맞습니다. 

스스로 경험한 것이니까요. 



 


의견이 엇갈리면 당연히 서로 조정하고 양보하고 합의와 타협을 합니다. 웃으면서 할 때도 있고 얼굴이 벌개지면서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러나 쉽지 않습니다. 

 

우리는 조용하게 싸웁니다. 

말과 말 사이에서 싸우고 눈과 눈빛 사이에서 다툽니다. 

표정에서 드러납니다. 토씨에서 보입니다. 

저는 이게 학교의  한쪽 모습이라고 봅니다. 

 

서로 다른 생각의 접점을 찾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학교, 교육, 배움을 바라보는 비슷한 시각을 가진 사람들이 모였고,  서로 잘 해보자면서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고, 만들지만 결국 어느 지점에서는 갈등이 일어납니다. 이건 필수이겠죠. 이것은 필수입니다. 


갈등 자체는 잘못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갈등은 서로의 입장과 생각이 다르기에 반드시 나오는 '어떤 것'입니다. 

내가 만진 코끼리를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는 이 갈등의 지점을, 서로의 '차이'와 '다름'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런 후에 고민을 할 것입니다. 

  




질문을 해 봅시다. 

 

우리가 '왜' 대안학교에서 만났을까요? 

왜 대안학교에서 내 새끼가 공부하길 바랐을까요? 

내가 왜?

학교와 얽힌 시간이 재미있나요?





우리가 성숙한 사람이라면, 

우리가 어른이라면, 

우리가 타인과 뭔가를 나눌 수 있다면,

우리가 타인을 이해하고 나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독도라면,

우리가 신라면이라면,

우리가 왕뚜껑이라면,  

갈등을 진정시키고 해결하는 방법을 찾아야 할 것 입니다.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해야 합니다. 

서로 인정하고 이해하고, 서로 오해하고 화해하고 받아들이고, 서로 도와야 합니다. 

지금도 해야 하고 앞으로도 해야 합니다. 

작년에도 했고, 올해도 하고 있고, 내년에도 할 것입니다. 

그것이 이 작은 학교의 '실험'과 '대안'과 '교육'을 지지하는 기반이 될 것입니다. 





코끼리는 긴 코와, 나무 기둥 같은 다리와, 까슬한 털이 달린 꼬리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우아한 곡선의 이빨도 있습니다. 

장판 같은 귀도 있죠. 

파주자유학교에서 '학교'의 실체는 누구일까요? 

건물이 학교인가요? 

학생이 학교인가요? 

교사가 학교인가요? 

 

저마다 생각하는 그것이 학교일 것입니다. 내가 생각하기에 중요한 '부분'이 학교를 이루는 실체일 것입니다. 그러나 내가 모르는 다른 부분도 학교를 이루고 있습니다. 꼬리는 다리를 이해하지 못합니다. 우아하고 긴 이빨은 넓적한 귀를 모릅니다. 분명한 전제는 우리는 다 '다르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우리들'이 모여서 학교를 움직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타인의 생각과 입장을 존중해야하고, 그래서 나의 입장과 생각이 존중받아야 합니다. 존중에는 나이도 경험도 재산도 직업의 구분도 없습니다.  





파주자유학교라는 대안학교에 내 아이를 보내는 우리들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까요? 

학교를 구성하는 우리들, 다시 말해 아이와 교사와 학부모들은 서로 어떤 관계일까요. 

우리는 대화, 인정, 이해, 공감을 하고 있나요? 





대안학교라고 해서 갈등이 없지 않습니다. 오히려 갈등이 더 많을 수 있는 조건입니다. 작으니까요.  

서로서로 어깨 너머로 보면 어떤 모습으로 살아가는지 다 보이니까요. 갈등이 있을 것입니다.  

다만 갈등을 드러내고 다루는 태도에서 성숙함과 미성숙함이 드러날 것입니다. 성숙한 사람이고 싶지만 쉽지 않습니다. 


 



좋은 게 좋은 거지라는 막연한 타협으로 속마음 꾹 누르고 있는 것을 바라지 않습니다. 꾹꾹 누르고 있다가 어느 날 폭발하기를 바라지 않습니다. 그것은 좋은 방법이 아닙니다. 해결책도 아니고요.  갈등을 더 드러내고 더 나은 해결 방법을 찾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많이 힘들 것입니다. 더 많이 미워하고 더 싫어하고, 꼴 보기 싫고 화가 날 것입니다. 그러면서 '변화'할 것입니다.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며칠 전에 노숙자가 길에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동영상을 봤습니다. 캐나다. 유투브에서 본 그곳 사람들은 살아가는 방식의 다름을 아는지 여러 실험을 하더군요. 길거리에 놓아 둔 '누구나 연주할 수 있는 피아노'가 있습니다. 노숙자가 있습니다. 남루한 꼴이 쓰레기와 별반 다르지 않아 보이는 남자입니다. 거지의 영혼이 담긴 피아노 소리를 보여주더군요. 우아하고 섬세한 소리였습니다.  

 

'실험'을 통한 '변화'가 대안학교의 핵심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기존의 교육 패턴과 경쟁하는 것이 아닌 다른 각도에서 접근하는 방법으로써 대안학교는 여전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변화. 

 

타인과 내가 관계를 맺어가면서 일어나는 변화. 

갈등의 와중에 내가 몰랐던 그 사람이 보이기도 하고, 그가 무시하던 내가 보이기도 할 것입니다. 

 




변화.

 

저는 이 학교에 아이를 보내면서 변화를 기대했습니다. 일반 학교 방식의 교육으로 얻을 수 없는 '변화'를 기대한 것이죠.

진안의 문제는 복잡합니다. 흔히 말하는 중2의 시기, 사춘기와 맞물린 성장기의 아이들을 위한 교육의 방법으로 집과 떨어져 보내는 일 년을 계획한 것입니다. 당연히 의도는 좋습니다. 도시의 아파트에서만 살던 아이들이 시골살이에 적응하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입니다. 그리고 적응합니다. 쉽게 하는 아이도 있고 끝내 못하는 아이도 있다고 합니다. 진안을 바라보는 여러 입장과 해석이 있을 것입니다.  

 

지금의 계획은 진안 생활을 하는 아이들의 연령대를 낮추자는 것입니다. 청미래 과정의 시작인 6학년 아이들이 대상입니다. 열 세 살. 지금 4학년 아이들이 첫 시작을 할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상황이고 6학년은 아직 어린애란 생각이 지배적이기에 아직은 모르겠습니다. 이것이 진안을 두고 벌이는 실험일 것입니다. 이 시도에 저는 찬성합니다. 결과는 결과가 나온 후에 생각해야겠죠. 


교사들의 생각과 염려하는 학부모들의 생각, 둘 다 맞습니다. 

그리고 결정이 났으니 학부모들은 도울 것입니다.





그렇다면 궁금한 것은 어떤 '변화'인가? 아이들이 진안에서 지내면서 어떻게 변할까? 라는 궁금증이 일어납니다. 

'진안'이란 장소는 하나이지만 진안 생활을 바라보는 눈은 많습니다. 아주 많죠. 해석이 많은 것입니다. 

현상은 하나, 해석은 천 개. 

 

이게 사람살이의 어려운 점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재미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여러 해석과 여러 입장을 모으다 보면 처음의 의도와는 전혀 다른 결과물이 나오기도 합니다. 이런 경험을 하는 게 '교육'이고 '변화'라고 생각 합니다. 그 결과가 비록 실패일지라도 말입니다. 실패는 배움의 과정에서 성공만큼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막연한 단어로서의 배움이 아닌 구체적인 '갈등'의 장소로서 진안은 배움과 변화의 장소가 될 것 같습니다. 

 

대안학교란 명칭이 이젠 심드렁한, 그렇고 그런 단어로 들릴 때가 있습니다. 

'실험'과 '변화'를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학교는 살아 있는 생명체와 같고 살아 있는 것은 언제나 성장 합니다. 

성장이 멈추면 썩고 병들겠지요.  

 

학교가 더 성장하고 더 자라나려면 우리는 더 많이 싸워야 합니다. 감정이 상할 것이고 화가 날 것입니다. 우리는 논쟁에 서툴고 토론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나도 그렇고 당신도 그렇습니다. 인정하고 다시 논쟁합시다. 대화합시다.  힘들면 쉬었다 합시다. 그렇게 해서 나도 변화하고 당신도 변화하고 학교도 자라고 아이도 자라게 합시다.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이곳에 모였습니다. 아이들이 돈을 벌며 살아갈 세상은 우리가 경험한 세상과는 전혀 다른 판일지도 모릅니다. 아니, 그럴 것입니다. 아이들이 스스로 실험을 하고 스스로 변화를 찾아가는 방법을 배워야 할 것입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겠죠.  거기까지가 학부모와 교사와 학교가 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학부모, 교사, 아이들. 셋이 발목이 묶였습니다.  

서로 밀지 말고 가야 합니다.  




* 다 쓰고 나니 엄청 비장하네. -..-

무슨 도 대표 연설문 같구만. 제가 2. 3학년 대표라서 그래요. 킁.  



2014. 10. 30. 



날짜

2014. 11. 6. 13: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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