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 아이들, 손모내기를 하다
- 풀꽃
우리 학교 중등과정에는 일주일에 두 시간 농사 시간이 있다. 밭농사다. 올해는 감자와 땅콩, 고구마를 주 작물로 하고 고추와 토마토를 약간 심었다. 들살이 기간과 봄 가뭄이 겹쳐서인지 며칠 전에 캔 감자는 크기와 양이 작년만 못하다. 본교에서는 주말농장 수준의 농사를 짓다 8학년 시골기숙생활하면서 아이들은 좀더 본격적인 밭 살림 들 살림을 꾸려본다. 제철에 나는 들나물과 산나물을 따 말리고, 열매로는 효소와 잼을 만들고 밭작물은 장아찌도 담그고 밑반찬 재료로 쓴다. 자급할 수 있는 먹을거리를 직접 기르고 갈무리까지 하는 것이다.
논농사도 8학년 때 하는데, 3기까지는 지역 농사짓는 분의 도움으로 벼농사의 전 과정을 체험할 수 있었다. 이후로는 여의치 않았는데, 농사가 생업인 분들에게 오히려 민폐가 돼 계속해서 부탁하기가 쉽지 않았다. 친환경 농업을 하시는 분을 용케 만나, 볍씨 침전부터 모판 만들기, 손모내기, 피사리, 낫으로 벼를 베고 나락 말리기까지 해봤던 그 아이들 중에는 밥솥에 붙어 있는 밥풀 한 톨도 허투루 하지 않으려 물을 둘러 긁어먹던 모습이 선하다. 졸업한 아이들은 이때의 체험을 인상 깊게 말하곤 한다.
불편함은 정신을 깨어 있게 한다고 한다. 노동의 어려움을 아는 이는 물건 하나 쌀 한 톨도 쉬이 대하지 않는 겸손함이 우러나온다. 얼마 전 인턴십을 다녀온 고등과정의 한 아이는 그동안 용돈을 너무 쉽고 편하게 써왔던 게 부모님께 미안하고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고 한다. 밥솥의 밥풀도 버리지 않으려 했던 아이도 그러한 마음이었으리라.
2기 아이들이 모내기 하는 모습
입학해 처음으로 농사수업을 할 때, 아이들은 대체로 하기 싫고, 귀찮다는 반응을 보인다. 흙 묻히기 싫다며 노골적으로 피하는 아이, 시늉만 내는 아이, 고랑과 고랑 사이를 건너다니며 노는 아이, 햇빛 알레르기가 있다며 빠지면 안 되냐는 아이까지 제각각이다. 그런 아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교사는 속이 타고 입이 근질거린다. 그렇게 구시렁대는 아이들을 데리고 3,4월은 이랑과 고랑을 만들고, 밑거름을 주고 서툰 손과 마음으로 깨알 같은 씨를 흩뿌리고, 한 뼘 크기의 모종을 심는다. 물주기와 북돋우기를 하고 몇 차례 풀을 뽑다보면 줄기도 굵어지고 지주대가 쓰러질 정도로 빽빽이 열매를 맺는다.
3기 아이들과 함께 했던 추수 풍경
여름이 오고 초등아이들은 익은 토마토를 따먹는 재미를 덤으로 얻는다. 학교 밭에서 딴 상추와 쑥갓, 풋고추가 학교 식당에 오르는 날이면 초등 교사들과 아이들이 수고했다, 맛있다고 한마디씩 하고 제육볶음과 함께 풍성한 식판을 받아들고는 뿌듯해한다. 조금은 내키지 않은 마음으로 농사시간을 대했던 아이들이 더운 날 김매기를 해도 처음 보였던 불평들은 쏙 잦아든다. 그래서 농사는 아이들의 반응에 물러서지 않고 일관되게 이끌어나가는 교사의 인내심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수업이다.
일정한 시간을 정해놓고 농사를 짓는 건, 귀농해 농사를 지으라는 것도 아니요, 친환경적인 소박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도 아니다. 스스로 몸을 놀려 밭을 일구고 작물을 관리하고 갈무리까지 서로 협업해 일정한 성과를 내고, 시작과 끝을 함께하면서 노동의 수고로움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그리고 땀 흘리고 난 뒤 먹는 물 한 컵, 허기를 달래주는 찐 감자 한 알의 진맛을 아는 바로 그 순간의 충만함이다. 그 충만함은 자신이 쓸모 있고 필요한 존재라는 인식이다. 서툰 손이라도 농사에서는 얼마나 요긴하던가. 그래서 농사야 말로 배우는 이와 가르치는 이 모두 함께 책임을 지는 배움의 과정인 것이다. 교사와 아이들과의 공동체성을 살리고 일상성을 유지하면서 육체노동의 기쁨을 알고, 흙을 만지며 경험하는 개인적 정서를 의미 있게 가져갈 수 있는 노작활동인 것이다.
현재 파주자유학교 학사가 세워지기 이전 청미래농장의 모습
그리고 올해 5월 말, 초중고 전체 식구가 모여 손모내기를 했다. 파주 성동리 학사에서 차로 10분 여 떨어진 절대농지에 논이 구해져, 8학년들도 본교로 올라와 함께했다. 요즈음엔 손모내기 행사를 일부러 할 만큼 색다른 체험으로 떠들썩하지만, 우리 학교는 조용하면서도 가족적인 분위기에서 손모내기를 마쳤다. 사각형의 반듯한 논 양 끝에서 중고 아이들은 모를 심고, 초등 아이들은 물놀이를 하듯 모잡이를 했다. 지나가던 어른 한 분이 한참을 구경하시더니 둑 가까이 와 모심는 법을 손수 보여주시기도 했다.
즐겁게 모잡이를 하는 초등 아이들
이날 학부모님들은 시원한 수박화채로 오전 새참을, 학교식당 조리사 분들은 못밥을 준비해주셨다. 손이 많아서인지 600여 평 정도 되는 논일이 세 시간 만에 끝났다. 일이 수월하게 끝난 것이 좋은지 흙물 든 손발 개의치 않고, 논 주변 흙바닥에 삼삼오오 모여 앉아 못밥을 달게 먹었다. 0학년 초등부터 고등과정 아이들까지 냉면기에 담긴 시원한 묵밥을. 그리고 사흘 뒤 우렁이를 논에 풀러 간다하니 초등 아이들 몇 명이 같이 가겠단다. 우렁이를 한줌 씩 쥐고는 풀 잘 먹고 다니라며 가장자리와 논 한가운데 힘껏 흩뿌려주고 왔다.
모밥을 달게 먹는 아이들
한 달 뒤 오전 수업이 없는 틈에 논에 갔다. 바리깡으로 밀어버린 사내아이 머리통마냥, 듬성듬성 빈 곳이 눈에 들어왔지만 처음 엉성한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모 줄기도 굵어지고 새끼치기도 왕성해 모양 좋게 심은 곳은 모가 빽빽하고 단단하게 자리잡고 있었다. 논두렁가에 두었던 남은 어린모도 팔뚝길이 만큼 자랐길래, 함께 간 푸른지네와 함께 듬성듬성 빈 자리에 모를 메웠다. 엄지손톱만 하던 우렁이도 통통해졌다. 손길이 미치지 않는 동안 햇빛과 물과 공기가 녹아든 논의 생명들은 그렇게 여물어갔다.
“모는 너무 깊이 심어도 안 되고, 얕이 심어도 안 된다. 흙에 살짝 꽂듯이 심어야 한다.”
농사 이력 지긋한 마을 어른의 참으로 지혜로운 말씀이 깊게 다가온다. 손모내기는 모가 쓰러지지 않을 정도로만 얕게 심어야 새끼치기가 잘 된다. 깊이 심으면 기존 뿌리 위에 새 뿌리가 나와 생육이 나빠진다. 스스로 힘으로 잘 자랄 수 있게 하는 것은 비단 농사에서뿐만 아니다. 삶과 교육에서 요구되는 태도다. 치우침 없는 정교한 균형감, 교사의 영향력이 넘치지도 모자라지 않게 작용하면서 아이들이 스스로의 힘으로 설 수 있게 하는 것. 파자가 지향하는 ‘자립’이다.
30도를 넘는 땡볕에 짱짱하게 자라는 여름 들녘의 모들이 어여쁘다.
2014. 7. 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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