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가 없는 우리 아이 

- 멀고느린구름 



대안학교 교사를 하면서 많은 부모들을 만났다. 그중 다수의 분들이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낼지 여부를 결정하려 할 때 대안학교에 가면 친구를 많이 못 사귀게 되지 않을까 우려하고는 했었다. 꼭, 대안학교 입학 여부로 고민하는 경우가 아니라도 아이가 집에 친구를 좀처럼 초대하지 않거나, 학교에서 혼자 급식을 먹었다고 고백해오면 우리는 깊은 근심에 휩싸이게 되고 만다. 우리가 혹시 왕따를 당하는 것은 아닐까 걱정이 되기도 하고, 이대로 사회성 없는 아이로 자라는 것은 아닐지 불안하기도 하다. 


그런 부모들과 만날 때마다 나는 내 어린 시절 이야기를 들려드리고는 했다. 초등학교 전학을 6번을 다녔고, 언제나 이방인으로 살면서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친구라고 부를 만한 이가 한 사람도 없었던 나의 이야기를. 그랬던 나에게도 이제는 자신 있게 친구라고 소개할 수 이들이 있고, 나는 보시다시피 히키코모리가(은둔형외톨이) 되지 않고 어엿하게 사회 생활을 해나가고 있다. 


오늘도, 친구가 없는 우리 아이를 어쩌나... 하며 노심초사하고 있을 부모들께 안심하시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그리고 지난 2008년, 파주자유학교 1학년 담임으로 생활하고 있을 때 쓴 아래의 글을 소개해드리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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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여도 괜찮아 (2008. 3월) 



오늘 1학년들과 함께 드디어 이토 히로시 작가의 <괜찮아, 괜찮아요>라는 책으로 우리말과 글 수업을 하였다. <괜찮아, 괜찮아요>는 예전에 내가 우연히 종로의 정독도서관에서 표지가 예뻐서 집어들고 읽다가 왈칵 눈물을 쏟았던 작품이다. 그래서 각별한 애정이 있었는데 절판이 되는 바람에 각 가정에서 구하는 데 큰 곤역을 치렀다고 들었다. 무튼 우여곡절 끝에 수업은 무사히 끝났다. 



나는 아이들에게 '괜찮아~'라는 말이 갖는 마법의 힘을 알려주고 싶었는데, 대체로 아이들은 이 책을 읽고 그 마법의 힘을 잘 느끼는 듯했다. 사실 이 책은 아이들보다는 어른들에게 더 권하고 싶다. 아이들의 불안은 대부분 어른에게서 기인한다. 어른이 자신의 불안을 내려놓고 편안하게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해주면 아이들의 불안은 대부분 사라지기 마련이다. '괜찮아'라는 말은 아이들에게 순식간에 평화를 주는 마법의 주문이다. 


책의 이야기 중에 특히 주목하고 싶은 부분은 아이가 놀이터에서 모든 아이들과 두루 잘 어울려 놀지 못할 때 할아버지가 "괜찮아, 괜찮아~"라고 말해주는 대목이다. 어른들은 대개 아이들이 여러 아이들과 두루 어울려서 잘 놀았으면 하는 바람을 갖는다. 아이가 내성적이기보다는 외향적이고 밝고 사교적이길 기대한다. 


그런데 잠깐! 아이에게 그런 기대를 품기 전에 어른들도 한번 스스로의 모습을 돌아보는 건 어떨까 싶다. 과연 어른들은 모두 외향적이고 밝고 사교적인 사람들일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그런 사람들로만 구성된 곳이던가? 과연 어른들은 그 누구와도 쉽게 친구가 될 수 있는 걸까? 마음에 들지 않아도, 도무지 영혼이 이끌리지 않아도, 그저 혼자이지 않기 위해 집단 속에 어울려야만 하는 걸까?



'왕따'라는 말이 유행어가 되면서 아이를 가진 어른들은 혼자인 아이에 대한 공포가 생기지 않았나 싶다. 그러나 '왕따'라는 말이 생기기 훨씬 이전부터 독립적이고자 하는 자아를 가진 아이들은 늘 존재해왔다. 타인과의 관계를 굳이 필요로 하지도 않고, 밝고 쾌활하지는 않지만 자기의 내면을 조용히 살펴가면서 자신만의 길을 찾아 묵묵히 성장해가는 아이들이 지구에는 그렇지 않은 아이들만큼이나 참 많다. 그런 아이들에게 왜 혼자냐고, 왜 '많은' 친구를 사귀지 않느냐고, 왜 좀 더 활발해지지 않느냐고... 어른들의 기대로 나무라고 강요하는 것은 오히려 아이를 불안하게 만드는 일이다. 


'왕따'라는 말은 아무 상황에서나 사용할 수 있는 말이 아니다. 사회학적으로 따지자면 '왕따'란 한 개인을 다수의 집단(왕따 땅하는 아이를 제외한 모든 아이)이 집중적이고 의도적으로 소외시키는 능동적 행위를 말한다. 그저 다수의 생활방식과 다른 형태로 지낸다고 하여 모두 '왕따' 당하고 있는 상황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저 자신의 방식으로 조금 다르게 홀로 살아가는 아이에게 '왕따'라는 말을 꺼내는 것은 오히려 어른의 폭력이다. 


여태껏 내가 행복한 과정(파주자유학교의 초등과정)에서 지내면서 실제로 공교육에서 말하는 '왕따' 현상이 나타난 적은 한 번도 없다. 다만 다수의 문화에 참여하지 않는 아이들이 다수의 문화에 참여한 아이들과 잘 어울리지 못하는 일이 있을 뿐이다. 


축구를 하는 게 다수의 놀이문화라고 하여 축구보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아이에게 친구를 만들기 위해 축구를 하라고 강요할 수는 없다. 그렇게 형성된 친구는 참으로 가슴 뛰게 하는 친구는 아닐 것이다. 책읽기를 좋아하는 아이에게는 책읽기 시간과 책읽기를 좋아하는 친구가 필요하다. 축구를 좋아하는 아이가 축구를 같이 할 친구가 필요하듯이 말이다. 


아이들의 삶은 이제 겨우 시작이다. 많은 세월이 남았고, 수도 없이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친구가 되었다 잊혀지기도 하고, 싸워서 헤어지기도 하며, 그러다 언젠가 다시 만나게 되기도 할 것이다. 1년, 2년, 더 나아가 5년, 그리고 6년... 이 세월이 가혹하게 길게 느껴지지만 인생의 긴 세월에 견주었을 때는 그리 긴 시간만은 아니다. 모든 아이, 또는 많은 아이와 어울리지 못하면 어떤가? 혼자이면 어떤가! 혼자여도 소수여도 만족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된 것이다. 괜찮다, 괜찮다. 


나는 초등학교를 여섯 번이나 전학을 다녔다. 초등학교 때 오래 사귄 친구가 있을 턱이 없다. 중학교 시절은 소위 공교육에서 말하는 왕따를 당했다. 고등학교 2학년 시절까지 구름은 '친구'라는 범주에 넣을 만한 인물이 마땅히 없었다. 6년, 3년, 2년. 총 11년의 세월 동안 나는 이렇다 할 친구 없이 살았다. 하지만 괜찮았다. 외롭기도 하고 힘들기도 했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나 혼자서도 놀 수 있는 방법이 많았고, 나 혼자 알아가고 싶은 것도 많았으며, 또래 아이들이 이해 못하는 나만의 세계도 많았다. 


다락방에는 늘 나의 귀여운 인형 친구들이 잠자고 있었고, 숲에 가면 다양한 목소리로 노래하는 새들과 듬직한 나무들이 있었으며, 봄 여름 가을 겨울 하늘에는 사랑스런 구름들이 거의 늘 떠있었고, 읽어야 할 책, 들어야 할 음악들이 넘쳐났다. 


어머니나 아버지는 그런 나를 불안해하기보다 오히려 아예 쟤는 좀 특이한 애라고 생각하셨던 것 같다. 왜 집에 친구를 한 명도 안 데려오느냐고 물어보기도 했지만 특별히 그 문제를 가지고 나에게 진지하게 조언을 하거나 하시지는 않았다. 아버지는 어떤 힘든 일이 있을 때면 <괜찮아, 괜찮아요>의 할아버지처럼 "괜찮타~"라고 부산 사투리로 웃으면서 말씀하시고는 했다. 


지금까지 내가 살아온 시간을 반추해보면 절실히 가까운 친구가 있었던 시절은 고등학교 2, 3학년, 대학교 1학년, 4학년 때 정도이다. 내가 사귄 친구들의 수는 열 손가락 안에 꼽을 수 있을 정도로 적지만, 그 친구들은 모두 진실하고 내 삶에 크게 영향을 준 무척 소중한 이들이다. 그래서 나는 많은 친구들과 인맥을 자랑하지만 종종 공허해보이는 밝고 외향적이며 쾌활한 이들이 그다지 부럽지 않다. 


혼자여도 괜찮다. 꽃들이 아무리 화려한 모양으로 나비를 유혹해도 나비는 향기로운 꽃에 내려앉는다. 자기만의 향기를 차분히 가꾸어가다 보면 그 향기를 맡고 더 아름다운 나비가, 더 사랑스런 벗이 날아들기 마련이다. 묵묵하게 자신의 향기를 홀로 가꾸어 가는 아이들에게 나는 편안한 목소리로 말해주고 싶다. 


"괜찮아, 괜찮아. 혼자여도 괜찮아."


일본 동화작가 이토 히로시의 <괜찮아, 괜찮아요> 국내에서는 절판되어 도서관이나 헌책방 등을 통해서만 구할 수 있습니다.




날짜

2014. 6. 18. 13: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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