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의 순간들 4

- 금안당 



네째로, 최선의 선택, 혹은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려면, 되도록이면 인생에서 한두 우물만 파야 한다. 특히나 30대 이후에는.

 

사람들은 선택의 자유에 대해 이야기하면, 원칙 없이 자유롭게 왔다갔다 하는 것을 상상할 때가 많다. 하지만 앞에서도 말했듯이 선택에는 책임이 따른다. 게다가 그 선택이 인생의 진로란 측면에서  중심 줄기와 관련된 선택이면 관련 책임의 양이 결코 적지 않다. 그러니 이 우물, 저 우물 하는 식으로 옮아가면 짊어져야 할 책임의 양도 몇 배로 늘어날 수 있다.

 

게다가 젊었을 때나 어렸을 때 생각하는 것만큼 인생은 길지 않다. 아니, 한 우물을 제대로 만들기에도(자신이 만족할 만큼) 벅찬 경우가 대부분이다. 사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가 되는 경우도, 실패의 경험이 그 이후의 진로와 연관성이 있고, 그래서 그 경험이 도움이 되는 경우에 한해서이다. 그렇지 않고 A를 하다가 실패하고 A와는 전혀 상관 없는 B 분야에 뛰어든다면, 앞서의 실패가 성공의 어머니가 될 가능성도 요원하고, 뒤늦은 출발로 인한 초조감과 미숙함으로 B 분야에서도 실패를 가져올 공산이 크다.

 

그러니 우물을 파는 것 같은, 중심 줄기와 관련된 선택을 할 때는 애초에 신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선택으로 벌어질 전망을 낙관해서가 아니라, 설사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 하더라도 그것을 감수하겠다는 각오가 있지 않으면 전공, 진로, 결혼 같은, 중심 줄기와 관련된 선택들을 함부로 해서는 안 된다.  

 

사람들은 흔히 다른 사람이 하는 게 좋아 보여서 자기도 따라서 그 길을 택하는 경우가 많다. 다른 사람이 파던 구덩이에서 물이 나오면, 사전 조사도 잘 안해보고 그 사람 옆 자리에서 구덩이를 파기 시작하는 꼴이다. 아이의 타고난 적성과는 관계없는 특정 대학, 특정 학과 선호 현상, 대기업 취업 열풍은 물론이고, 특정 음식 체인점 창업 바람, 특정 품종의 농산물 과잉 재배 등등도 마찬가지다. 앞에서 이야기한 남을 의식한 선택을 하는 경우의 하나이고, 실패한 선택이 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경우의 하나이다.

 

대안학교를 선택할 때도  대안학교의 단편적인 몇 가지 모습을 보고는 대안학교에 대한 기대가 너무 클 때가 있다.  그런데 문제는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기 마련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이상향은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마련해주는 게 아니다. 또 그렇게 쉽게 호락호락 얻어지는 것도 아니다. 게다가 아이에게 학교의 선택은 '중심 줄기'의 선택 중 하나이다. 성인과는 다른 의미에서이지만 자라나는 아이에게도 시간은 그리 많지 않다. 아이의 교육 환경이 안정되지 못하고 자주 바뀌는 것은 아이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러니 이유가 있어서 대안학교를 일단 선택한 경우에는 그 선택을 밀고 나가야 한다. 학교나 교사, 혹은 다른 여건이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일부 있다고 해서, 아이에게 결정적인 환경을 자주 바꾸는 것은 좋지 않다. 학교가 마음에 안 드는 구석이 있다면, 차라리 그걸 바꾸려고 노력하는 편이 아이더러 전혀 생소한 환경에서 불리함을 무릅쓰고 다시 처음부터 시작하게 하는 것보다는 낫다.

 

애초에 선택을 신중하게 하면 이런 상황을 줄일 수 있다. 어차피 삶은 개선 혹은 변혁되어야 할 것들 투성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 사람(자신이든, 미성년자인 자식이든)의 중심 줄기와 관련된 선택을 내릴 때는 현실에 이루어진 모습이 아니라 '잠재력' 혹은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가를 보고 결정한다.

 

예를 들어 아이가 축구를 좋아하긴 하지만, 축구에 전혀 소질이 없거나 노력해도 별 가능성이 보이지 않으면, 부모 입장에서는 아이에게 다른 진로를 고민해보도록 권하는 게 맞다. (하지만 부모가 아이가 축구 선수가 되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아서 반대하는 건 맞지 않다.) 그래야 체육중학교나 관련 고등학교까지 진학했다가 도중 하차하는 곤란한 상황을 막을 수 있다. 또 전반적으로 봤을 때, 대안학교가 내 아이의 성장에 일반학교보다 더 도움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판단했으면, 그렇게 밀고 가면 된다. 가능성을 현실화 시켜 내는 건 이제 '주체'가 된 나의 역할이지, 가능성을 선택했다고 해서 저절로 현실에서 그대로 이루어지는 건 아니다.

 

성인인데도, 마음만 앞선 나머지, 중요한 결정을 하면서 현실 가능성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선택하는 경우들이 있다. 이런 경우는 결국 이 우물 저 우물 자꾸 파헤치기만 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그리고 자신이 선택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선택을 철회하는 핑계로 환경 탓이나 남 탓을 한다. 하지만 이 경우에 돌아봐야 할 것은 두 가지 측면이다. 하나는 나의 선택 철회가 과연 타당한가라는 것이고(예를 들어 상사가 마음에 안 들어서 3년이나 취업 공부를 해서 들어간 직장을 그만둬야겠다는 판단이 과연 타당한가라는 것), 다른 하나는 철회가 불가피하다면, 왜 애초에 잘못된 선택을 내렸는가 하는 것이다.

 

이렇게 물으면 흔히들 '이럴 줄 몰랐다'고 답하지만, 탓해야 할 것은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한 자신의 판단력이다. 그래서 자신이 성급하게 판단하는 경향이 있다거나, 자신감이 부족해서 소극적인 선택을 하는 경향이 있다거나, 아니면 자신이 은근히 한탕주의식 욕심을 부리는 경향이 있다거나 하는 평가를 내릴 수 있게 되면, 설사 이번 결정을 철회하더라도 실패의 교훈은 가져갈 수 있고, 이는 앞으로의 선택을 신중히 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혹은 이번의 철회 판단이 주는 교훈을 역으로 작용시켜, 선택을 철회하지 않고 다시 한번 새로운 마음가짐으로 잘해보기로 마음먹을 수도 있다.

 

워낙 빠른  속도에 젖어사는 요즘 젊은이들이 잘 모르는 것 하나는 신중하게 선택한 한 우물을 평생 파는 우직한 사람이 중요 결정을 쉽게 자주 바꾸는 사람보다 삶을 성공적으로 살 확률이 높다는 것이다. 비록 떼돈을 못 벌고, 주위 사람들의 비웃음을 받거나, 시대에 뒤떨어지는 것 같은 자괴감이 들지라도, 그 사람이 하는 일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일의 하나라면, 그 사람은 시간과 노력을 들일수록 자신이 하는 일을 더 잘 하게 될 것이며, 그만큼 사회는 그의 존재를 필요로 할 것이다.

 

거북이와 토끼의 경주에서 그 경주가 그냥 일회적인 경주라면, 그 전래동화는 잘못되었다. 하지만 그 경주가 한 번의 인생이라는 긴 시간에 걸쳐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 전래동화가 사실일 확률이 크다. 사실 현실에서도 거북이의 수명은 백년 가까이 되지만, 토끼는 몇 년밖에 살지 못한다.

 

물론 실수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으니, 아무리 중심 줄기와 관련된 결정일지라도 애초에 잘못 선택했을 수도 있다. 이런 경우는 무조건 우직하게 밀어붙이는 것이 능사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실수는 되도록 빨리 알아채고 되도록 빨리 선택을 철회하는 것이 좋다. 예를 들어 결혼을 했는데, 배우자가 결혼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는데, 도저히 용인하고 부부로서 살기 힘들다고 판단이 들면, 한시 바삐 이혼하는 것이 좋다. 자녀가 생기기 전에 말이다. 자녀가 생기고 나면, 이혼을 선택하기가 갈수록 더 힘들어진다. 아이의 인생까지 영향을 미치는 선택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말 중요한 문제와 관련된 결정이 아닌, 사소한 선택들이라면 오히려 너무 신중한 것이 에너지 낭비이고 실(失)이 될 수도 있다. 오히려 사소한 문제들에서 당신의 아량을 보인다면, 정작 중요한 문제에서는 상대방의 양보를 끌어낼 가능성이 커진다. 그러니 정말로 최선의 선택을 하려면, 지혜로워야 한다. 그리고 지혜로우려면 다른 무엇보다 무엇이 중요한 문제이고, 무엇이 사소한 문제인지 파악하는 데 우선순위를 두어야 한다.

 

그래서 다섯번째로 최선의 선택을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위해서' 그런 선택을 하는지 잊지 말아야 한다.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하고 어떤 선택을 할 때, 우리는 그 행위와 선택이 뭔가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한다. 말하자면 그 행위와 선택은 그 자체로 독립적인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삶 전체에 걸쳐서 만들어내려고 하는 거대한 그림퍼즐 중 한 조각일 수 있다. 혹은 그 그림, 즉 우리가 이루고자 하는 바와는 상관없는 조각일 수도 있다. 후자라면 그냥 심심해서나 그냥 재미로 하는 게 아니라면, 우리는 잘못 행동하고 잘못 선택하고 있는 것이다.

 

사는 데 쫓기다 보면,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면서도 왜 굳이 안 해도 되는 그 행위를 하는지 자신도 모를 때가 많다. 예를 들어 아이가 학교에서 받아온 성적표가 엉망이다. 엄마는 아이가 공부를 게을리 한 것에 화를 내고 아이를 야단 치고, 아이를 다잡고 아이를 학원에 보내기도 한다. 그래서 다음 고사에서는 아이의 성적이 좀 올랐다. 엄마는 아, 내가 적극적으로 쪼으면 아이 성적을 향상시킬 수 있구나를 깨닫고 더더욱 아이를 닥달한다. 엄마에게도 아이에게도 우울한 삶이 전개되고 있다.

 

애초에는 좋은 의도였다. 아이가 배우는 학생으로서 최소한의 노력도 안 하고 불성실하게 살아도 좋다고 생각하도록 내버려둘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말하자면 아이의 품성을 도야하기 위한 엄마 나름의 조처였다. 하지만 이제는 애초의 목적을 잊어버리고 그야말로 성적 자체가 목적이 되었다. 평소에 성적으로 아이를 평가하는 건 어리석은 엄마들이나 하는 짓이라고 비웃어왔는데, 이제 자신이 그러고 있는 것이다. 처음 아이의 성적을 올려줬을 때 느꼈던 한 순간의 희열에 중독되고 만 것이다.

 

문제는 이런 경우가 한두 번으로 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삶의 상당 부분을 자신도 '왜' 하는지 모르는 행위를 하고 생각을 하면서 낭비하고 있다. 부모에게 세뇌받은 아이도 어릴 때부터 '난 커서 의사선생님이 될 거야'라고 한다. 왜 의사가 되려고 하냐고 물으면, 제대로 답을 못하거나 솔직한 아이는 '돈 많이 벌려고요'라고 답한다. 부모들은 이런 식으로 아이를 키우고도 나중에 아이의 품성이 문제가 있다는 걸 알면, '왜 그럴까요? 난 그렇게 안 가르쳤는데.'라고 말한다. 단순히 아이의 품성만이 아니다. 부모가 자신의 행위와 생각과 선택을 자신이 추구하는 목적에 맞게 구조화해내지 못하면, 그 모습을 보고 자란 아이도 자신의 인생을 설계할 능력도, 어떤 선택을 해야 자신이 원하는 바를 얻을 수 있는지 파악하는 능력도 상실한다.

 

그러니 지혜로워지려면, '내가 왜 이런 생각을 하고, 왜 이런 행위를 하고, 이런 선택을 하고 있지?'라고 자주 스스로에게 물어보는 게 좋다. 그리고 상대방에게도 그의 결정에 대해 이런 물음을 이따금 던져주는 게 좋다. 그가 다시금 생각해보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예를 들어 우리가 어떤 일을 집단으로 기획할 때 우리는 그 기획의 '컨셉'을 정한다. 그리고 그 컨셉을 중심으로, 혹은 그것과 연관을 가지면서 그 컨셉(목표)을 실현할 다양한 방안들을 계획하고 토론한다. -- 이렇게 되어야 그 회의가 유의미하고 효율적일 수 있다. 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컨셉에 대한 이해 정도에서부터 시작해서 상당수의 회의는 중구난방이거나 타성화하기 쉽다. 아니면 청와대 국무회의처럼 보스의 일방적인 깨알지시를 따르는 것 정도에서 회의가 성과를 보거나. 

 

이는 우리 사회의 구성원 대다수가 민주적인 토론에 미숙해서이기도 하지만, 여하튼 여러 사람이 관련된 사회적 활동에서도 이럴진대, 그리고 컨셉에서 시작하는 어느 정도 완성된 형식적 논의틀이 있는 경우에도 이럴진대, 개개인의 사적인 일상활동이라면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우리는 자신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모르면서 살고 있다. 우리는 자신이 제자리에서 뺑뺑이를 돌고 있는지, 아니면 어디론가 가기는 가고 있는 건지, 정말 자신이 가고 있다고 여기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 건지 알지 못한 채 그냥 살아가고 있다. 한마디로 인생을 낭비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목표를 확실하게 견지하고, 왜라는 물음의 답변을 통해 어떤 행위가 그 목표에 어느 정도 기여하는지를 알게 되면 우리는 선택의 우선 순위를 정할 수 있다. 어느 것이 중요하고 어느 것이 부차적인지 판단할 수 있다. 이따금 지나온 인생 여정을 되돌아보면서 '그때 내가 정작 중요한 걸 보지 못하고, 사소한 것에 욕심을 내다가 그만 그런 잘못된 선택을 했구나'라고 한탄하는 사람의 이야기를 듣곤 한다. 우리 자신이 굳이 이런 때늦은 후회의 주인공이 될 필요는 없다. 사실 좀만 신경 쓰면 된다. 살면서 자신이 뭘 하고 있는지 되돌아보면서, '왜'라는 물음을 자주 던지면 된다. 처음에는 이렇게 하는 게 골치 아프고 부담스럽게 느껴질 수 있지만, 장담하건대, 장기적으로 보면 당신에게 엄청난 유익(有益)을 가져다줄 것이다.

 

그리고 여섯째이자 마지막으로 최선의 선택, 혹은 후회하지 않는 선택을 하려면 당신에게 주어지는 상황에 저항하지 말고 열려 있어야 한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우리 영혼은 자신의 영적 경험을 위해서 가능성이 가장 높은 상황을 스스로 선택한다. 그리고 이는 우리가 태어날 때만이 아니라 태어난 이후에도 계속된다. 사실 앞에서 우리가 설정하는 인생의 목표라는 이야기를 했지만, 이 의도적으로 정한 목표가 우리 영혼이 하려는 일과 일치하는지 아닌지는 알 길이 없다. 아마도 영혼이 하려는 일은 영적 성장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영혼이 이번 삶에서 우리의 영적 성장을 위해 하려는 구체적인 일이 무엇인지 인간의 의식이 알 도리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은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에 적합한 상황을 끊임없이 우리에게 끌어오지만, 우리는 정신(혹은 마음)을 사용하여 이 상황을 해결하려 한다. 예를 들어 어릴 때 개에게 물린 경험이 있어서 개를 몹씨 싫어하는 집배원이 있었다. 그런데 그는 우편 배달을 하면서 걸핏하면 개에게 쫓기거나 개에게 물리곤 했다. 겁이 나서 때로는 개 있는 집에는 우편물을 배달하지 않기도 하고, 때로는 완전무장을 하고 몽둥이까지 들고 배달을 하기도 했다. 그의 사정을 아는 다른 집배원들이 최대한 개가 적은 지역을 그의 배달 구역으로 바꿔주었지만, 그는 늘 긴장한 채로 배달을 다녀야 했다. 여기까지는 우리 정신이 생각해낼 수 있는 해결법으로 주로 주어지는 상황에 저항하는 해결법이다.

 

하지만 사건이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아도 이제 노이로제 상태가 된 그는 집배원을 그만두든지, 아니면 개의 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고민하던 어느 날, 이제까지는 개가 없던 집이었는데, 젖을 갓 뗀 어린 강아지 한 마리가 마당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그와 눈길이 마주치자 어린 강아지가 겁을 먹고 마당 구석으로 도망가는 게 아닌가! '아니1 저 어린 놈까지 나를 무시해?'하면서 욱, 하고 화가 올라오려던 그가 문득 깨달았다. '내가 개들을 두려워하고 미워하니, 지금까지 개들도 내가 두려워서 그런 공격적인 행동을 했던 거구나'라는 사실을. ... 그 후 그는 개도 사랑스런 동물의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고 개들을 대하게 되었고, 그러자 더 이상 그와 개와의 트러블은 벌어지지 않았다. (지어낸 이야기이니 따지지 마시압.)

 

이런 것이 영혼이 상황을 끌어오는 이유이고 해결하는 방식이다. 우리의 정신(이성)으로는 도저히 헤아릴 수 없는 이유이고, 방식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인생에서 비슷한 문제가 반복되어 나타나는 사람을 우리는 자주 만난다. 영혼이 어서 빨리 문제를 해결하라고 자꾸 들이미는 것이라고 볼 수밖에 없는... 그리고 상황에서 도피하거나 저항하는 것으로는 문제가 잘 해결되지 않는 상황을...

 

이럴 때 해결법은 주어지는 상황에 저항하지 말고 그 상황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받아가는 것이다. 동전의 반면은 이 힘든 상황에 영혼이 우리에게 주는 엄청난 기회가 있다는 것이다. 사실 위의 예에서 든 집배원은 힘들었지만, 마지막에 대단한 영적 깨달음을 얻었다. 그의 영적 수준이 질적으로 비약한 것이다. 그는 이제 단지 개를 바라보는 시각만이 아니라, 세상의 다른 존재들을 바라보는 시각도 바뀌었을 것이다. 그리고 수동적인 수용이 오히려 적극적인 창조를 불러올 수 있음도 경험했을 것이다. 그래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시각으로 세상을, 삶을 바라보게 되었을 것이다. 실용적인 관점에서 보더라도 집배원은 왠만한 인간의 노력으로는 얻기 힘든 보물을(진짜로 인생을 역전시켜 줄 보물을) 얻게 된 것이다. 그러니 그의 영혼은 그에게 엄청난 행운의 기회를 준 셈이다.

 

물론 인간사에는 이런 해피 엔딩보다는 새드 엔딩이 훨씬 더 많은데, 이는 우리 인간들이 겸손하지 않아서이다. 사실 많은 인간들이 자신이 알고 있는 얄팍한 지식과 경험 몇 가지가 알아야 할 진리의 전부라고 생각하면서 오만방자한 태도를 취하거나, 다른 사람의 그것들과 우열을 다툰다. 세상과 우주에 인간이 알지 못하고 이해할 수 없는 심오하고 방대한 측면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사실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세상에 있게 되었는지, 우주가 어떻게 탄생했고, 어떻게 전개되어갈지, 또 어떤 식으로 운행되고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것 투성이이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판단이 우선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더 이상 새로운 것이 흡수되지 않는 경직된 사고방식을 갖는다. 편협한 종교인, 권력욕 강한 정치인, 이념적 *** 주의자, 좋고 싫고의 선호가 유달리 강한 사람들, 정서적 심리적으로 불안정하거나 폐쇄적인 사람들, 중독자들 등등이 대표적이다. 이런 경직된 사고방식의 소유자들은 영혼이 전하는 메시지를 읽지 못하거나 자기 식으로만 해석하기 때문에, 그 기회를 기회로 활용하지 못한다.

 

하지만 마음이 열려 있는 사람들은 영혼이 하고자 하는 바에 (이따금) 몸을 맡길 수 있다. (물론 일반인들도 자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자기 마음의 틀이 있기 때문에 항상 그럴 수는 없지만.) 그리고 이럴 때 이따금 '기적'이 일어난다.

 

한 예로 예전에 학교 학사를 건축하고 근린생활시설로 준공 승인을 받으려는데, 깐깐한 특감 건축사에게 걸렸는지, 시설 형태가 학교 형식이라면서 근린생활시설로는 인정하기 어렵고, 준공 승인을 받으려면 교육연구시설을 건물 용도로 재신청해야 가능하다고 했다. 이 소식을 처음 전해들었을 때는 다시 비용을 들여서 일부 시설을 개보수 해야 하는 데다, 승인 날자가 예정보다 늦춰지기까지 하는 터라 학교 관계자들은 불만이 많았다. 하지만 우리는 건축사와 시비를 벌이느니, 그냥 요구하는 조건에 맞춰주기로 결정했다. 그런데 그로부터 채 2개월도 지나지 않아 모텔과 분쟁이 났는데, 우리가 '교육연구시설'로 준공을 받은 것이 오히려 다행인 상황이 벌어졌다. 마치 새옹지마 같은 상황이 된 것이다.

 

이처럼 인간의 인지로는 유불리를 판단하기 힘들다. 앞으로 어떤 상황이 전개될지 인간의 인지로는 파악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현재의 순간을 열린 마음으로 온전히 받아들여 그 상황에서 최선의 선택을 하는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최선의 선택은 자신의 입장을 최대한 관철시킬 수 있는 선택을 하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당장은 자신이 일부 희생을 하더라도 갈등 상황을 증폭시키기보다는 해소하는 쪽의 선택을 말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열려 있다는 것, 현재 순간을 온전히 받아들인다는 건 상대방, 혹은 그 상황이 지금 여기에 존재하는 이유를 충분히 존중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성경에 보면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는 아니지만, 신은 우리에게 우리가 감당할 수 있는 정도의 고난만을 준다고 했다. 우리에게 안겨지는 이 고난은 우리의 선택 혹은 선택들을 통해 해소될 수도 있고, 악화될 수도 있다. 하지만 우리에게 주어지는 이 고난이 이유 있는 것, 우리 영혼의 성장을 위해 필요한 것이라는 '겨자씨만한 믿음'만 있어도 우리는 새옹지마의 새옹처럼 삶을 훨씬 여유 있게 대할 수 있을 것이고, 삶에 짓눌리는 것이 아니라 우리 뜻대로 삶을 활용하고 즐길 수 있을 것이다.


 

2014. 7. 6. 



날짜

2014. 7. 7. 0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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