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속 병영생활관 풍경
임병장과 이병장, 그리고 김상병
- 금안당
소설가 이외수씨가 지난 6월에 터진 임병장 사건과 이번에 폭로된(사건 자체는 4월에 터졌지만) 윤일병 사망 사건을 놓고 "참으면 윤일병, 못 참으면 임병장"이라고 말해서 항간에 화제가 되었다.
그런데 다른 시각에서 보면 임병장과 (윤일병을 사망케 한) 이병장을 대비시켜 볼 수도 있다. 인터넷 기사들에서 보건대, 둘 다 관심 병사였다가 병장이라는 최고 선임이 되었다. 그런데 임병장은 최고참이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같은 동기는 물론이고 후임들에게서까지 선임 대우를 못 받는 '열외' 병장이었던 반면(하지만 임병장을 근무조가 집단적으로 왕따 시켰다는 증거는 없다), 이병장은 최고참의 지위에 오르자마자 자신의 상관인 하사까지 '동생'으로 부리면서 진작부터 의무반의 '폭군'으로 권력을 행사했다.(윤일병을 폭행한 병사 중에는 윤일병 배치 전에 이병장에게 가혹행위를 당했던 병사도 있었다.) 그리고 이병장은 이렇게 기득권을 누리는 위치에 있어서 그러했는지, 그의 기록에는 어느새 관심병사라는 주홍글씨도 지워졌다.
또 하나 차이는 임병장은 군대라는 조직의 성격으로 보면 최악의 경우라 할 수 있는 아군을 향한 총기 난사와 무장 탈영으로 5명의 사망자와 7명의 부상자가 나온 엄청난 사건임에도, 변호사를 3명이나 고용한 덕분인지는 알 수 없지만 심각한 피해 상황과는 대조적으로 동정 여론까지 등장한 반면, 이병장은 가족이 사선 변호사를 고용했다는 이야기는 없고, 대통령에서부터 정치인들, 언론, 그리고 분노한 네티즌들에게 이병장은 거의 '악마'로 매도당하고 있다.
물론 임병장의 경우에는 '욱'해서 저지른 우발적 사건이란 점에서 동정의 여지가 있고, 이병장의 경우에는 몇 개월간 계속해서 악랄한 가해자였다는 점에서 동정의 여지는 거의 없다고 할 수 있다. 또 임병장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아무리 동정을 해도, 또 아무리 사선 변호사를 고용해도 저지른 죄가 워낙 커서 무기징역 아니면 사형이 내려질 수밖에 없는 반면, 이병장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동정하거나 그냥 내버려두면 사건의 축소, 은폐가 벌어져 제대로 죄값을 치르지 않을 수도 있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여론의 향배가 이렇게 돌아가는 게 일견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다.
하지만 과연 이렇게 보는 것이 옳은 것일까? 아니, 옳고 그르고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눈에 보이는 것이 전부일까? 교사 경험이 있는 나는 다른 상상을 해본다.
그건 임병장도 이병장도 위의 결정적인 사고들을 치지 않고 무시히 제대하여 사회에 복귀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라는 상상이다. 그들은 어떤 삶을 살아갈까? 임병장의 변호인들은 임병장이 군대에 와서는 안 되는 상태, 다시 말해 심리적 장애가 있는 상태였다고 한다. 그렇다면 임병장은 정상적인 사회 생활이 불가능할 것이다. 그는 아마 평생 집에만 있거나, 설령 사회생활을 하더라도 그 피해의식 때문에 그는 무능력해서 사람들을 짜증나게 만들고, 최악의 경우에는 남들에게 심한 피해를 입히게 될 것이다.(내가 피해의식이라고 말하는 건 임병장이 자신에게 잘해준 병사까지 사살하고 뒤늦게 후회의 눈물을 흘린 것이나, 그가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킨 계기가 무슨 가혹행위를 당해서가 아니라 어떤 병사(들)이 그린 해골그림 때문이었다고 진술했기 때문이다.) 예전에 40대가 될 때까지 청소년 때 입은 상처로 방에만 틀어박혀 지내다가 작은 기업체 사장인 아버지의 눈물어린 호소에 마음을 내어 아버지 회사에 근무하기 시작한 사람 이야기를 텔레비젼에서 본 적이 있다. 그는 출근 3일만에 회사 직원이 농담처럼 던진 한 마디에 욱하여 그 직원을 칼로 찔러죽였다.
반면에 이병장이 (윤일병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지는 않은) 자신의 가혹행위를 들키지 않고 만기제대 했다면, 그는 아마 그런 대로 잘 살았을 것이다. 군인 시절 자신이 더 공격적이고 폭력적이 될수록 오히려 자신의 말에 복종하는 부하들을 가졌듯이, 허세도 부리고 꼬장도 부리면서 어떤 집단에서든 우두머리 자리를 얻기 위해 열심히 살았을 것이다. 그리고 후임 시절에는 그도 맞았다는 증언에서 알 수 있듯이 자신보다 힘 센 사람에게는 순종하는 것도 병행하면서. 그리고 임병장과 달리 이병장은 나름의 현실적 능력도 발휘했을 것이다.(하사가 직금과 상관없이 그를 상전으로 대한 건 '우리들의 영웅'에서 담임이 반장에게서 그러했듯이 그에게서 현실'적인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아무리 허세를 부려도 무능력하면 그를 따르는 사람이 아무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그는 강자에게 약하고 약자에게는 강한 태도를 취하면서 현실에 잘 적응하고 살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사람들은 임병장과 이병장을 사회에서 만났을 때, 누구에게 더 화를 내고 누구와 더 가깝게 지낼까? '파리대왕'에서 보듯이 다수의 사람들은 임병장 같은 사람을 동정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병장 같은 사람을 좋아하거나, 뭐 그닥 좋아하지는 않아도 세상에 임병장과 이병장 부류밖에 없다면, 이병장 부류와 더 가깝게 지낼 것이고 자신도 이병장 부류의 사람이 될 것이다. 이렇게 사람들이 인정해주니 이병장은 우여곡절이야 겪겠지만, 그래도 임병장보다는 잘 살아갈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성향은 임병장적이 아니라 이병장적이다. 그리고 이병장을 욕하는 많은 사람들도 이것이 '현실'이라고 인정하면서 살고 있다. 반면에 임병장이라는 현실은 주변부 현실, 아니 우리 사회의 지배적인 성향이 만들어낸 부작용 영역이다. 그리고 죽은 윤일병은 이등병이라는 최하위 계급이고 (훈련소에서 윤일병이 적은 '각오'에서 보듯이) 성품이 순하고 성실한 사람이라는 점에서 이 먹고 먹히는 피라미드 구조(어쨌든 지배적 구조)에서 최하위 지점에 위치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사회의 이런 구성은 아이들이 어릴 때부터,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면서부터 '훈련'된다. 아들을 군에 보냈거나 앞으로 보낼 부모들은 임병장 사건때보다 윤일병 사건 때 '내 아이를 군에 보내고 싶지 않다'는 거부감이 더 강하게 드는 듯하지만, 사전에 피해를 막는다는 차원에서 자세히 들여다보면, 임병장의 경우에는 워낙 우발적인지라 사고를 피하기가 더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말하자면 임병장 같은 경우는 일종의 '묻지마 범죄' 혹은 '묻지마 분노'이다. 그리고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들은 악랄한 범죄자라기보다는 감호치료가 필요한 환자들이다. 그러니까 임병장 사건의 최종 책임자는 치료 받아야 할 환자를 부모에게서 떼어내 군대라는, 환자로서는 감당하기 힘든 사회조직에 밀어넣은 정부이다.
하지만 윤일병 사건의 경우에는 사고를 피할 수 있는 여지가 더 많았다. 이병장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가 아닌 건 분명하다. (그가 한때 관심병사였던 건 맞지만, 그를 알고 있는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전하는 정보를 보면, 그는 편한 보직을 위해 일부러 관심병사이길 자청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에게 분노조절 장애가 있다고 보는 의견들이 있지만, 설사 그렇다 해도 그가 임병장처럼 자신도 감당할 수 없는 막무가내식 행동을 한 것이 아니라, 남의 눈을 피하고 후임들을 자기 행위에 동참하게 하여 책임을 분산하는 등의 행동을 한 것으로 보아, 그는 자신의 분노를 우리 사회에서 '허용'되고 있는 범위에서 표출했음을 알 수 있다. 단지 그것이 폭력과 구타, 가혹행위가 공공연하게나 은밀하게 허용되는 군대라는 조직 내에서 벌어진 것이어서 일반인들이 보기에 끔찍해보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아마도 다른 환경, 다른 조직이었다면 그는 자신의 폭력성, 공격성의 수위를 더 낮추었을 것이다. 그리고 일반인들이 사회에서 그를 만났다면, 임병장보다는 '크게 문제 없는 인물'로 평가했을 것이다.
그리고 이병장에게 동조해 윤일병에게 가혹행위를 가한 동조자들이 있다. 영화 '파리대왕'을 보다 보면, 약한 아이를 배려하는 애초의 리더에게 등을 돌리고 어린 '폭군'을 따르기로 선택하는 아이들에게 과연 다른 선택의 여지는 없었던가라는 의문이 떠오른다. 설령 무인도라는 고립무원의 환경이고 형사법 대상 연령에도 미치지 않는 철 없는 8살~12살의 어린아이들이라 할지라도 말이다. 잔혹한 짓을 서슴치 않는 '폭군'이긴 하지만 그 아이 또한 동년배의 어린 나이이긴 마찬가지인데 말이다. 하지만 이런 의문은 처음에는 어쩔 수 없이, 혹은 마지못해 폭군의 졸병이 되기로 한 아이들이 나중에는 오히려 앞장 서서 다른 아이를 죽이는 잔혹한 짓을 저지르는 장면에 이르르면 답이 나온다. 그렇지 않다는 답이. 다수의 아이들이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 아니라, 그 아이들의 심성 자체, 혹은 그 아이들이 받은 도덕 교육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선택을 한 것이구나, 라는 답이.
윤일병 사건에서 이병장에 동조한 사람들은 열살짜리 꼬맹이들도 아닌 20대 청년들인 데다가, 파리대왕에서와는 달리 고립무원의 무인도도 아닌, 아무리 별개로 운영되는 의무반이라 해도 바깥 사람들의 시선을 끊임없이 의심해야 하는 부대 내 별관이었는데도, 이들은 말도 안 되는 무법상황에 동조한 데다 자신들 스스로도 그 무법상황을 만들어내는 데 일조했다. 어찌 보면 동정의 여지가 없는 게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7, 8명의 부대원 중 이병장과 윤일병을 뺀 나머지 거의 대부분이 가혹행위에 참여했다는 것이다. 1, 2명의 리더격인 가해자와 다수의 동조자, 그리고 소수의 피해자와 그래서는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겁이 나서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않는 진짜 방관자들 - 이는 교사의 눈을 피해 왕따와 학교 폭력이 일상적으로 벌어지는 교실 상황과 흡사하지 않은가? 사실 예전과 달리 요즘 아이들은 대학 1, 2학년 때 입대를 한다. 그러니까 말이 대학생이지, 대학생이라는 이미지에서 나오는 지성인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그야말로 새내기 청년, 아직 사춘기의 좌충우돌식 행동방식을 거의 벗어나지 못한, '아이들'에 지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이들은 고등학교까지 지속되던 폭력적 교실문화의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오히려 이 문화를 군대문화에 전달하는 역할을 한다.
하지만 학교폭력에서도 주도적인 가해자를 제외하고 다수의 동조자는 언제나 처벌받지 않듯이, 아마 이번 사건에서도 살인죄 적용 여부가 논란이 되는 이병장과 달리 이들 동조자들은 상대적으로 훨씬 가벼운 형량이 선고될 것이다. 그런데 가해자가 가해자로 계속 존속하는 건 이들 동조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직접 폭력에 가담하지는 않더라도 가해자에게 심적인 지지를 보내고 피해자를 비웃고 야유나 욕설 등 간접 폭력 행위를 하는 이들은 방조자가 아닌 동조자들이다.) 동조자는 그중 소수만이 처벌받는다. 이 이야기는 설사 가해자가 처벌받아 사회에서 일시 격리되더라도 그대로 남아 있는 다수의 동조자들에 의해 우리 사회의 폭력적 문화, 폭력적 분위기는 여전히 유지된다는 것이다.
그리고 소심함으로 인한 진짜 방관자들과 피해자가 있다. 이 둘 간의 경계선은 불분명하다. 왜냐하면 방관자들은 피해자가 선택되는 풀pool 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독일인 신학자 마르틴 니뮐러는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라는 시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치가 공산당원을 잡아갈 때 나는 공산당원이 아니어서 모른 체했고, / 나치가 사회민주당원을 가뒀을 때 나는 사회민주당원이 아니어서 모른 체했고, / 나치가 노동조합원을 잡아갈 때 나는 노동조합원이 아니어서 모른 체했고, / 나치가 유대인을 잡아갈 때 나는 유대인이 아니어서 모른 체했다..... / 그들이 막상 내 집 앞에 들이닥쳤을 때 나를 위해 말해줄 사람이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러니 방관자들과 피해자들이 계속해서 방관자와 피해자로 있는 한, 이들 또한 폭력적인 비민주적 문화가 유지되게 만드는 데 일조하는 셈이다.
세월호 사건에서도, 이번 윤일병 사건에서도 지시하는 대로, 다시 말해 "가만히 있어라."와 "외부에 알리지 마."라는 지시에 착실히 순종하고 따른 이들은 그 댓가로 자신의 목숨까지 바쳐야 헀다. 그렇다면 왜 이 사회에서는 온순함이나 착실함, 성실함, 순종의 대가가 피해자가 되는 것인가? 그건 우리 사회 시스템의 성격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먹고 먹히는 피라미드 구조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순한' 사람들, 혹은 자진해서 자신을 약자의 위치에 놓는 사람들은 우리 사회 시스템의 성격을 오해하고 있거나, 사태를 지나치게 낙관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 우리 사회가 피라미드 구조인 건 우선 그것이 적자생존과 경쟁을 생존의 제일 법칙으로 삼는 자본주의 경제논리에 따라 운영되고 있기 때문이고, 둘째로 국가 권력이 국민 전체의 이해관계를 대변하고 보호하는 역할을 하지 않고 이 피라미드 구조의 상층부에 위치한 이들의 이익만을 대변하고 보호하기 때문이며, 마지막으로 남북분단과 휴전이라는 특수 상황이 이런 모순을 증폭시키고 있기 때문이다. -
마지막으로 이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는 사람들이 있다. 하지만 이들은 이미 기득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되도록이면 이 먹고 먹히는 구조 안으로 들어오지 않는다. 그래서 이들은 자식들을 최대한 군에 보내지 않는 것이다. - 여담이지만, 나는 장차관 이상의 공무원들과 장성들, 국회의원들, 판검사 등등의 자식들은 반드시 (현역으로) 군대를 가야 한다는 규정이 있다면, 우리나라 군대 문화가 틀림없이 훨씬 더 개선될 것이라고 장담한다. - 굳이 들어갈 필요가 없다. 자신의 위치를 이용하여, 이 먹고 먹히는 구조가 만들어내는 결실을 쉽게 손에 넣을 수 있으니 말이다.
사실 이 폭력적이고 비민주적인 문화의 최종 결실은 언제나 지배층에게 돌아간다. 이런 점에서 보면 동조자는 물론이고, 가해자조차 실익은 없이 그냥 꼭두각시 놀음을 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군기를 잡으라는 상부의 닥달에 선임들은 후임들을 닥달하고, 그 과정에서 일부 선임들(가해자)이 선을 넘는 행동을 하고, 그러다 사고가 터지면(아니 이번처럼 사고가 폭로되면) 누구보다 먼저 가해자가 처벌을 받는다. 과도한 지시를 내린 상부 인사에게까지 그 책임을 묻는 경우는 드물다. 하지만 가해자는 선을 넘는 그 행동에서 자신의 감정을 멋대로 배출할 기회를 가진 것 말고는 무슨 이득을 취할 게 없다. 행여 불이익을 당할까봐 동조자의 위치에 섰던 병사들의 경우에는 더 말할 것도 없다.
사실 우리 사회는 불필요할 정도로 많은 임병장과 이병장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리고 이 때문에 일반인들, 다시 말해 평균적인 사람들이 불시에 자주 피해를(그것도 생명까지 걸어야 하는 피해를) 입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병들었다는 이야기이다. 군대로만 보더라도 올해 6월 30일 기준으로 전체 병사 중 23.1%(8만 811명)가 보호관리 병사로 분류되어 있다고 한다. 이 가운데 C급은 제외하고 B급과 A급만 해도 2만 8천명 정도(8.1%)이다. 신검을 통해 복무 부적격자를 어느 정도 선별한 이후일 텐테도 말이다. 군대가 제대로 분류했다고 치면, 이들이 예비 가해자와 예비 피해자들이다.
그런데 이 정도 수치라면, 나머지 사람들은 정신을 바짝 차릴 필요가 있다. 오늘 당신이 만나거나 스쳐간 100명의 사람 중에 10명이 '위험인물'이었다는 이야기이니까 말이다. 2, 30년 전만 해도 '임병장' 같은 사례는 드문 사례에 속했다. 하지만 지금은 초중고등 학교 학생들에게 심리검사를 해보면, 우울증, 과잉행동장애 등의 심리 장애를 앓고 있는 경우가 10~20% 정도로 나온다. 반면에 군병력이 모자란다는 핑계로 군복무 적합 판정을 받는 비율은 90%가 넘는다. 이 때문에 중등도 이상의 관심 병사만 해도 8%가 넘는다.
그러니까 지금의 병사 구성은 고등학교 때까지 심각한 가해자와 피해자로 드러난 경우들은 걸러졌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위계적이고 폭력적인(먹고 먹히는) 교실문화, 그리하여 '비정상'적인 심리상태가 만연한 문화가 그대로 병영으로 옮겨진 꼴이 된다. 그리고 위계질서를 강조하고 반론이나 비판을 허용하지 않는 군사문화 때문에 일부 걸러졌음에도 불구하고 이 폭력적인 정서는 교실에서보다 더 강화되어 나타난다.
가만히 보면 가해자의 가혹 행위도, 동조자들의 기회주의적 행위도, 그리고 피해자였다가 욱하고 참지 못해 가해자가 된 임병장의 행위도 그 저변에 깔린 심리는 분노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 분노는 피해자에게로 확산된다. 군대에서 가혹행위의 피해자가 되었던 사람들은 당장은 그 분노를 표출하지 못해도 이를 갈면서 분노를 키운다. 그러니까 우리나라 청년들은 학창 시절에는 학창 시절대로, 군대 복무기에는 또 그때대로 분노를 해소하지는 못하고, 오히려 분노가 더 심화될 가능성이 높은 환경을 견뎌내야 하는 셈이다. 나라의 장래를 생각해도 정말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물론 지배층의 입장에서는 전혀 심각한 문제가 아니다. 권력은 청년들의 이 분노를 자신의 적들에게 쏟게 만들면 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폭력적 문화를 만들어내는 이 분노의 악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것일까? 무엇보다 가정환경과 교육환경이 경쟁과 스트레스가 덜하고, 아이를 존중하는 환경, 아이가 자존감을 가질 수 있는 환경으로 바뀌어야 한다. 사실 나는 어른들의 막연한 두려움 때문에 아이들을 어린 시절부터 경쟁과 스트레스의 지옥으로 몰아넣는 상황이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 이런 어른들은 수시로 바뀌는 점수 몇 점을 얻기 위해서 아이에게 얼마나 치명적인 위해를 저지르는지 모르고 있다.
그리고 존중받지 못하는 사람의 내면에는 분노가 자란다. 그 분노는 세상을 향해서 쏟아낼 수도 있고, 부모를 향해서 쏟아낼 수도 있으며, 타인을 향해서 쏟아낼 수도 있고, 자해나 자살처럼 자신을 향해 쏟아낼 수도 있다.(하지만 존중한다는 건 단순히 배려하거나 보호하는 것이 아니라, 한 인격으로 대하는 것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또 자존감이 있는 아이는 스스로 선택하고 그 선택에 책임질 줄 아는 아이이다. 스스로 판단능력이 있기에 위험한 상황에서도 현명하게 대처할 수 있는 능력과 용기가 있다.
하지만 위에서 말한 해결책을 사용하기에는 너무 늦은 경우라면, 군대를 좀더 나이 들어 보내는 건 어떨까? 지금처럼 '매도 일찍 맞는 게 낫다'는 심정으로 고등학교 졸업한 직후나 대학 입학 1년차에 허둥지둥 입대 시키지 말고, 아이에게 세상과 사회와 사람를 보는 식견이 좀이라도 더 쌓이고 마음의 여유가 좀이라도 더 많아진 20대 후반에 말이다.
p.s. 윤일병 사건의 위 분석에서 빠진 사람은, 그냥 사고로 묻힐 뻔한 이 사건의 일부 실상을 동조자 중 한 명에게서 전해듣고, 상부에 고발한 김모 상병이다. 정작 의무대에 장기 입원 중이어서 사건의 정황을 가장 잘 알고 있던 모 상병의 경우에는 오히려 증언 출석을 거부했지만, 김 상병은 용기를 내어 윤일병의 죽음이 정말 억울한 죽음이 되지 않도록 만들었다. 위에서 말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의 한 예라 할 것이다. 하지만 정상적인 건강한 사회라면 이런 사람들이 다수가 되어야 하는데, 우리 사회는 이런 내부고발자들이 그야말로 가뭄에 콩 나듯이밖에 나오지 않는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할 것이다.
2014. 8.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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