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웅과 악마, 그리고 진정한 영웅 

- 금안당 



대중은 영웅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대중이 원하는 영웅의 역할을 끝까지 해낼 수 있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는다. 인간은 신이 아니기 때문이다. 하지만 대중이 영웅에게서 바라는 것은 신과 같은 능력, 신과 같은 완벽함, 신과 같은 포용력이다. 그래서 영웅은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존재하거나, 미화된 고인으로만 존재한다. 그가 대중의 뇌리 속에서 끝까지 영웅으로 남아 있으려면, 그는 어느 지점에서(박수 받을 때) 죽어야 한다. 죽은 자는 대중이 마음대로 미화할 수 있다. 그가 이루지 못하고 죽은 일이라도 대중의 머리 속에서는 '그라면'(그가 살아 있었다면) 해낼 수 있었던 일이라고 가정된다.

 

대중은 영웅과 함께 악마도 필요로 한다. 대중은 영웅이 현실적으로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한다고 여기듯이, 악마도 실제로 존재할 수 있고 존재한다고 여긴다. 대중이 악마를 필요로 하는 건, 자신이 가진 부정적 에너지를 쏟아낼 대상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반면에 영웅이 필요한 건 '희망'이 있어야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중에게는 영웅보다는 악마가 더 필요하다. 왜냐하면 영웅은 대중에게 막연한 생존 이유를 주지만, 악마는 대중에게 지금 이 순간을 악착같이 살아가야 할 확실한 이유를 주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사랑보다는 분노가 더 즉각적인 에너지원으로 작용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래서 '성공적인' 정치 선동가는 대중에게 자신을 믿고 따라 달라(다시 말해 자신을 영웅으로 대접해달라)고 말하기에 앞서, '저 사람이 악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자신이 악마인 저 사람(혹은 그들)을 쳐부술 적임자라고 내세운다. 말하자면 먹잇감을 먼저 던져주고, 그 먹잇감을 제공한 게 자신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대중의 영웅은 선인이 아니고, 대중의 악마는 악인이 아닌데, 대중은 그렇게 착각한다는 데 있다. 진짜 선과 진짜 악은 따로 있거나 상대계인 이 세상에는 없다. 하지만 대중은 지성이 아닌 감정에 따라 움직이기에, 그 악마가 진짜 악인지, 혹은 어느 정도 악인지 판단하지 않는다. 그를 악마로 볼 수 있는 한두 가지 명분, 혹은 한두 가지 근거만 있으면 충분하다. 자신들의 공격성을 쏟아내는 게 더 시급한 일인지라, 이것저것 따지는 건 시간낭비에 불과하다.

 

세월호 참사가 터지자 정부는 (대통령이 나서서) 유병언을 악마로 지목했고, 언론은 이를 확정지었으며, 대중은 이를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마치 유병언이 고의로 세월호 승객 300여명을 수장시키라고 선원들에게 직접 지시라도 한 것처럼. 그런데 그 악마가 자신을 악마로 지목한 정부가 영웅이 될 기회도 주지 않고, 허무하게도 시신으로 발견되고 말았다. 그것도 이미 80%나 백골화가 진행된 초라한 노숙자 행색으로.

 

게다가 지난 3개월 동안 유병언을 찾기 위해 연인원 13000명의 검경 병력이 동원이 되어 그의 사생활과 주변을 샅샅이 뒤졌지만, 그가 유독 악마라는 증거는 더 이상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파헤칠수록 그를 악마로 지목한 권력과의 의심스런 접점들(해경, 정관계로비, 언딘, 김기춘 비서실장, 大통령을 지칭하는 유병언의 메모 등등)만이 더 많이 부각되었을 뿐이다.

 

어쨌든 유병언 악마 만들기는 시들해지고 말았다. 물론 아직도 '죽은 자는 말이 없다'를 무기로 하여 정부가 이 작업을 계속 추진할 수는 있겠지만, 그 효과가 예전만 하지 못할 건 분명하다. 유병언은 죽음으로 이미 그 죄값을 치뤘기 때문이다. 사실 인간의 역사에서 영웅은 죽어도(아니 죽어야) 영웅으로 칭송될 수 있지만, 악마는, 특히나 이렇게 쉽게 죽은 악마가 악마로 계속 저주 받은 사례는 없다. 오히려 유병언의 허무한 죽음은 대중으로 하여금 과연 그가 진짜 악마였는가라는 회의를 불러오고 있다.

 

설사 유병언이 '악마'라 해도, 10년 넘는 기간 동안 수천 명의 피해자가 발생했고 551명의 사망자가 났으며, 이들의 피해와 죽음에 직접적인 책임이 있는 부산 형제복지원 사건의 원장 박인근과 비교하면, 그 악랄함의 정도에서 유병언은 새발의 피 같은 존재일 수 있다. 어쨌든 세월호 사건은 의도적이지 않은 '사고'가 개입된 사건이니 말이다.

 

어제 만난 재일교포분은 일본 방송에서는 세월호 사건 관련하여 유병언에 대한 언급보다는, 세월호 선장이 팬티 바람으로 배에서 탈출하는 장면만 계속 반복하여 방송하면서, 우리나라 사람에 대한 선입견, 다시 말해 무책임하기 짝이 없고 이기적이고 어리석은 민족이라는 이미지를 일본 국민들에게 심어주고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우리나라 언론들이 세월호 사건 초기에 그랬던 장면들이 떠올랐다. 이런 게 소위 말하는 언론의 '선정성' 일 것이다. 그런데 이 선정성이 우리 언론에서는 피해자의 입장을 대변해주는 측면 때문에 크게 문제점으로 부각되지 않았지만, 일본 언론이 똑같은 선정성을 살리고 보니, 우리 민족 전체가 매도당하는 식이 되고 만 것이다.(물론 의도적으로.)

 

이런 걸 보면 지금의 언론만큼(특히 시청률을 의식한 언론만큼) '진실'을 규명하는 데 장애물이 되거나, 교묘하게 '진실'을 왜곡하는 역할을 하는 것도 없다 할 것이다. 세월호 사건을 겪으면서 kbs 기자 등 일부 언론들이 '기레기'가 된 자신들 모습을 반성하긴 했지만, 내가 보기에 우리나라 언론이 갈 길은 아직 멀고도 먼 것 같다. 그러니까 단순히 가해자를 공격하고 피해자를 대변하는 것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것이다. 아니 문제가 왜곡될 소지가 많다는 것이다. 이렇게 하다 보면 표면적인 가해자를 쉽게 악마로 과장함으로써 대중의 시선이 오히려 문제의 본질에서 벗어나게 만들 수 있다. (아마도 일부 언론은 일부러 이렇게 하고 있겠지만.)

 

나는 해방 이후, 특히 6.25 전쟁 이후 한국 사회에 부족한 것이 합리성 혹은 객관성이라고 생각한다. 다시 말해 이성적 판단이 부족했다고 생각한다. 사실 지난 60여년 간 우리 사회는 현대사 과정에서 생긴 이런저런 피해의식에 사로잡힌 사람들에 의해 지배당해왔다.  그리고 이런 사람들이 지배자의 위치에 설 수 있었던 건 대중 차원에서도 똑같은 피해의식을 가진 사람들이 다수 존재하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그 결과 사회 전체가 상당 정도 '감정적'으로 굴러왔다. (피해자에 대한 동정심만이 감정적인 게 아니다. 사회가 '독재적'으로 운영되던 과거를 '좋았던 옛 시절'로 회고하는 사람들이나 '북한'이라면 이를 가는 소위 '반공주의자'들도  감정적이긴 마친가지다.)

 

반대로 우리 사회에서 객관적 '사실'을 말하고,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태도를 견지하고자 했던 사람들은 대중에게 무시당하거나, 심하게는 사회에서 매장당하곤 했다. 피해의식에 젖은 대중이 원했던 건 냉철한 이성적 태도가 아니라, 영웅이나 악마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유병언 사태에서도 그러했듯이, 언론은 대중의 이런 감정적 태도를 앞장서서 더 조장하곤 했다. 이를 위해 언론은 사건에 대한 어떤 사법적인 판단이 내려지기도 전에 먼저 악마를 단죄하거나 영웅을 만들어내는 데 앞장섰다. 실상 언론이 할 일은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입장에서 객관적 '사실'을 찾아내어 이를 알 권리를 가진 국민에게 전달하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자기 할 일은 하지 않고 월권 행위를 한 것이다.

 

반면에 나는 이번 세월호 사건의 유가족들, 무엇보다 사건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요구하는 유가족들에게서 지금까지의 여러 사건 사고들의 피해자들에게서는 느낄 수 없었던, 희망의 빛을 본다. 그들은 사랑하는 가족을 잃은 그 참담한 슬픔과 좌절감을 딛고 두 번 다시 이런 끔찍한 일이 우리 사회에서 벌어지지 않도록, 그리하여 다른 누군가가 이런 아픔을 겪는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사건의 진실을 밝히고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길 원한다. 그들은 더 이상 유가족이나 피해자 가족이 아니다. 그들은 선지자들이다. 그래서 내 눈에는 이들이야말로 진정한 '영웅'으로 보인다. 만들어지지 않은 자생적인 '영웅'. 그러니까 진짜 '영웅' 말이다. 


* 그렇다면 내 식의 시각을 더 연장하면 이 '영웅'들을 음으로 양으로 핍박하는 사람들 - 굳이 언급하지는 않겠지만 - 은 '악마'가 되는 것인가? 



2014. 8. 7. 


날짜

2014. 8. 8. 08: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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