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의 자제력을 키우자
- 금안당
예전에 ebs '아이의 사생활'이라는 다큐에서 아이들의 자제력 차이가 아이의 성장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알아보는 실험을 보여준 적이 있다.
그 실험에서는 자제력이라고 표현하지 않고 '만족지연 능력'이라고 명명했는데, 어쨌든 실험자는 아무도 없는 널찍한 방안에 앉아 있는 4세 유아들에게 머시멜로를 주면서, 지금 먹어도 괜찮지만, 자신이 잠깐 바깥에 다녀올 동안 먹지 않고 기다리면 하나씩 더 주겠다는 단서를 덧붙였다고 한다. 그러자 아이들은 다양한 모습을 보였다. 실험자가 뒤돌아서자마자 먹는 아이, 망설이면서 눈치를 보다 먹는 아이, 하나를 더 얻기 위해 눈을 감고 꼭 참는 아이... 아마도 개중에는 좀더 느긋한 태도로 실험자를 기다린 아이도 있었을 것이다.
이 실험이 의미하는 결과는 15년 후 이 아이들이 치른 미국의 대학입학 수학능력 시험인 SAT 점수에서 드러나게 되는데, 참지 못하고 머시멜로를 먹은 아이들과 참고 기다린 아이들의 점수 차이가 확연할 정도로 컸다고 한다. (아이의 사생활 다큐에서는 이 자제력, 혹은 만족지연능력을 도덕성의 일부로 보고, 아이가 도덕적 태도를 갖도록 훈육하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했지만, 자제력이 과연 사람의 품성 중 도덕성에만 귀속되는 것인지는 의문스럽다.) 그러니까 자제력이 그 사람의 타고난 잠재력을 현실화시켜주는 주요 변수의 하나로 작용한다는 이야기다.
옛날에는 어떤 의지나 행동이나 말, 노력의 결과물을 얻기까지는 참고 기다려야 한다는 인식이 일반적이었다. 거의 매사가 그러했다. 시계를 보고 시간에 맞추어 일정을 꾸려가는 게 아니었기에, 배가 고파오기 시작하면 그때부터 밥을 했다. 아이는 시간으로 치면 배 고프고 나서 한두 시간은 기다려야 밥을 먹을 수 있었다. 제철 아닌 음식의 맛을 그리워하는 건 그 음식을 그 자리에서 먹을 수 있기를 바라서가 아니라, 제철에 그 음식을 드디어 먹게 되었을 때, 그 음식을 더 감칠 맛 있게 만들어주는 양념의 역할을 했다.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이었다.
서양식으로 말해 어느 장인의 도제가 되면, 어느 스승의 제자가 되면, 기술과는 관련도 없어 보이는 가장 허드레 일부터 시작했다. 그 수련생이 누구도 하기 싫어하는 그 허드레 일을 군말 없이 성실히 해내는 것을 보고서야 스승은 그가 배울 준비를 갖추었다고 판단했다. '빈 수레가 요란하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속담이 있듯이, 사람들은 섣부름, 설익음, 성급함을 경계하고 경계했다.
또 자연에 의지하여 자연과 더불어 살다 보니, 자연이 인간에게 가하는 제한을 당연시했다.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는 일이 많지 않았다. 억지로 그렇게 하면, 그 대가가 결코 작지 않다는 걸 사람들은 일상의 경험으로 배우곤 했다. 똑같이 돌이라도, 똑같이 나무라도 용처에 따라 사용할 목석의 종류도, 그 가공법도 달랐다. 자연의 산물을 인간의 힘으로 바꿀 수는 없으니, 인간이 자연을 더 잘 알고 더 잘 이해해야 했다. 인내심을 가지고 충분히 관찰하고 신중하게 제대로 판단해야 했다. 이렇게 해서 얻어진 앎은 세대에서 세대로 이어지며 전수되었다.
그래서 전통적인 삶은 절제와 인내를 인간이 가져야 할 중요한 미덕의 하나로 여겼다. 그리고 아이들에게도 이를 가르쳤다. 그중에서도 자연과 완전히 융화된 삶을 살았던 부족이나 민족일수록 절제의 미덕이 더 강조되었으리란 건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일이다. 사실 북미 인디언들은 그러했다. 북미 인디언들은 아이들이 절제하고 인내하는 힘을 기를 수 있게 하는 데 사냥교육을 자주 이용하곤 했다. 모든 감각을 동원하여 짐승의 흔적을 찾고, 추적하고, 사냥감을 발견하면 포획할 적당한 순간을 기다리고, 현장의 마지막 돌발사태에 민첩하게 대응하고...
물론 아이들의 나이에 맞는 작은 사냥감으로 하는 교육이었다. 하지만 요즘 아이들이라면, 아마 결코 해내지 못할 것이다. 사냥기술의 문제가 아니라, 인내력이 없어서이다. 이건 요즘 아이들이 낚시를 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인스턴트 문화에 너무 익숙해졌기 때문이다. 아이들은 욕구를 느끼면 그 자리에서 해결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엄마에게 밥을 달라고 하면, 엄마가 금방 밥을 차려줘야 하는 게 당연하다고 여긴다. 자연의 과실들도 철이 없어졌다. 비닐하우스 등으로 계절에 관계없이 얼마든지 인공재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겨울에 여름철 과일인 참외를 못 먹는 건 철이 안 맞아서가 아니라, 돈이 없어서일 뿐이라고 여긴다. 아무래도 제철 과일이 아니면 값이 비싸기 때문이다.
얼마전에 본 교육관련 영상에는 이런 게 있었다. 선생님이 강의식이 아닌 새로운 교수법으로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 그래서 각자 문제지를 들고 각자 힘으로, 혹은 아이들끼리 문제를 풀고 있었다. 그중 한 아이는 문제를 푸는 중간 중간 선생님에게 확인을 부탁한다. 맞았는지, 틀렸는지. 선생님이 잘못된 곳을 지적해주면 또 좀 풀다가 선생님을 찾는다. 그렇게 몇번을 하다가 문제를 해결했고, 아이는 자랑스런 마음을 또 한차례 선생님에게 표현하고 나서야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그 아이가 워낙 큰 소리로 교사를 찾는 통에 교사는 아이가 부를 때마다 아이 곁으로 와서 반응을 보여주지 않을 수 없다.
교사를 계속 찾는 그 아이는 자기만 우선이다. 교사가 자신을 봐줄 상황인지 아닌지 교사에 대한 배려도 없고, 다른 아이들은 선생님을 얼마나 필요로 하는지, 다른 아이들에 대해서도 배려하지 않는다. 이런 것도 요즘 아이들이 보여주는 인스턴트적 태도의 하나이다. 자신의 필요가 최우선으로 충족되어야 한다고 여기는 것이다. 아마도 아이가 공부만 해준다면, 엄마 아빠는 아이의 하인이 되어도 감지덕지로 여기는 요즘의 가정 풍속도가 아이의 이런 태도를 조장했을 것이다. 사실 요즘 아이들은 집에서 왕자나 공주 대접을 받는 경우가 많다. 그리고 왕자와 공주는 자신의 욕구 충족을 참고 기다릴 필요가 없다. 왕자와 공주를 기다리게 만든다면, 그건 시녀나 하인이 잘못해서이다.
그만큼 요즘 우리나라에서는 절제나 인내심을 기르게 하는 걸 교육의 한 부분으로 삼지 않고 있다. 오히려 아이에게 즉각적 만족을 주는 걸 아이를 위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다. 이 때문에 요즘 아이들은 참을성이 부족하다. 하지만 절제와 인내라는 미덕이 주는 대가는 위의 실험에서와 같은 시험 성적만으로 한정되지 않는다. 우선 조급하고 성급한 사람보다 그렇지 않은 사람이 살면서 더 적게 실수하리란 건 분명하다. 또 처음에는 똑같이 실수해도 성급하지 않은 사람은 성급한 사람보다 그 실수에서 실패의 원인을 좀더 본질적인 측면에서 찾으려고 노력한다. 따라서 실패로 인해 성급히 좌절하지도 않는다.
또 절제하고 인내할 줄 알면, 깊이 있는 체험을 할 수 있다. 성급히 자리를 옮기지도 쉽사리 목표를 바꾸지도 않기 때문이다. 물론 애초에 앉을 자리도, 목표도 신중히 선택하는 편이다. 하지만 우연한 선택이었더라도, 인내심이 있으면 자신의 선택에 책임질 수 있다. 예전에 '결혼이야기'라는 영화가 있었다. 남녀가 서로 좋아해서 결혼을 했는데, 막상 함께 살다보니 서로의 생활습관을 참아내지를 못하고 싸우고, 결국 이혼까지 갔다가 다시 우여곡절을 거쳐 재결합을 하는 이야기였던 것 같다. 다툼의 원인은 치약을 끝에서부터 짜서 쓰느냐, 아니면 중간에 쿡 짜서 쓰느냐 같은, 그야말로 사소한 습관차이들이었다. 사실 요즘의 높은 이혼률은 젊은 부부의 인내심 부족이 원인인 경우도 많다. 그러니 인내심이 부족하면, 삶을 깊이 있게 체험하지 못할 뿐 아니라, 최선을 다해 살 수도 없는 경우가 많다.
절제나 인내심이 있으면 좋은 점 다른 한 가지는 타인을 인정하고 배려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물론 인내심이 있다고 배려심이 저절로 따라오는 건 아니지만, 어쨌든 참는 게 그리 힘들지 않은 사람은 성급할 때는 남이 안중에도 없는 것과 반대로 세상과 남들을 적어도 안중에는 넣을 정도의 여유를 가지게 된다. 사실 독선적인 사람들 대부분이 성마른 사람들이다. 남들의 선의의 조언을 들을 여유조차도 없다. 하지만 세상은 조건 있는 것이고, 인간은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으므로, 절제와 인내심이 있어서 세상과 타인을 품을 여유가 있는 사람은 그렇지 않은 사람보다 많은 것을 이룰 수 있다.
아마 절제와 인내심이 있으면 좋은 점은 일확천금을 기대하여 섣부른 결정을 하지 않는 등 이외에도 많을 것이다. 그런데 앞에서도 말했듯이, 우리는 이 미덕을 아이들에게 가르치는 걸 너무 소홀히 하고 있다. 아니, 아이들이 이 미덕을 기를 기회를 거의 주지 않고 있다. 그러고는 아이들이 뭔가를 요구하면, 그 요구를 어떻게든 들어주려고 허둥지둥 애쓰고 있다. 흔히 말하는 '애 버릇 나빠지게' 만들고 있는 셈이다. 그런데 요즘 청년들이 한편에서는 취업이 안 되어서 아우성이면서, 다른 한편에서는 중소 기업 같은 경우 이직율이 높고 3D 업종 같은 경우에는 아예 청년 구직자를 찾을 수가 없는 모순된 상황이 빚어진 데는 우리나라 교육의 이런 결함에도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사실 이 글을 쓰게 된 건, 출판사 일로 <내 영혼이 따뜻했던 날들>을 교정보다가, 인디언의 방식으로 손자를 교육하는 할아버지가 손자인 작은나무에게 어떤 식으로 인내심을 기르게 하는지를 새삼 눈여겨보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부분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작은나무는 봄에 씨를 뿌렸던 수박이 익기를 애타게 기다린다. 하지만 다른 작물에 비해서 수박은 익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는지라, 작은나무는 뻔질나게 수박밭을 드나들면서 수박이 익었는지 살펴보곤 했다. 그러다가 할아버지에게 익은 수박처럼 보이는 걸 찾아냈노라고 보고한 것도 어느 새 여러 번이었다. 할아버지는 그때마다 작은나무와 함께 수박밭에 가서 확인해보지만, 번번히 아직 아니라고 하신다. 드디어 어느 날 작은나무는 익은 게 거의 확실해보이는 수박을 찾아냈고, 할아버지와 작은나무는 다음날 새벽 확인을 하러 갔다. 소리로, 또 지푸라기로 확인해보았지만 100% 확실한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수박을 먹고 싶은 작은나무의 간절한 마음을 무시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좀더 익히기 위해서 오전 나절은 일하고 점심 때 따기로 하였다. 작은나무는 오크라 잎을 따면서 한시바삐 해가 중천에 올라오기를 바라지만, 해는 그날따라 옆걸음질을 치는 것마냥 게으름을 피운다. 하지만 마침내 점심 시간은 왔고, 할아버지와 작은나무는 그 수박을 따서 시냇물에 넣었다. 그래서 정작 작은나무가 그 수박맛을 본 것은 저녁이 다 되어가는 늦은 오후였다.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당연히 '수박 하나 먹으려고 이 기나긴 인고의 시간은 다 뭐람!'하는 불평이 나올 수 있다. 게다가 할아버지는 거의 다 익은 수박을 놓고, 부러 새벽부터 저녁까지 12시간이 넘는 기다림의 시간을 또다시 작은나무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 대목에서는 할아버지의 치밀한 의도성이 분명히 느껴진다. 그렇다면 할아버지는 작은나무에게 이렇게 참고 기다리게 하는 것으로 어떤 교육적 효과를 노렸던 것일까?
어찌 보면 이 마지막 질문은 어리석다. 왜냐하면 인디언은 어떤 경우에도 교육이 입력한 대로 출력되는, 무슨 수학식 같은 것이라고 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 한 가지는 할아버지는 작은나무를 놀려 먹으려고 참고 기다리게 만든 것이 아니라, 참고 기다릴 줄 아는 능력을 작은나무에게 키워주려고 애썼다는 점이다. 그만큼 그것이 작은나무를 위해서 중요하고 필요하다고 보았던 것이다.
자, 여러분은 어떻게 하겠는가?
2014. 3.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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