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파주자유학교 중고등과정 교사로 재직 중이신 푸른지네 선생님께서 작년 가을 아이들과 함께 남한강 자전거길 종주를 마치고 쓰신 글입니다. 




조령에서 화전까지 (2013)

- 푸른지네(파주자유학교 교사)



아직도 실감 나지 않습니다. 나는 일상으로 돌아온 걸까? 코스모스 만발한 가을 길, 양옆으로 펼쳐진 황금빛 물결, 그림 같이 파란 하늘, 해맑은 표정으로 바람처럼 달리는 아이들... 4박5일이 순식간에 지나갔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한참을 멍하니 앉아있다가 비로소 제 몸이 있는 곳을 알아차렸죠. 아, 집에 왔지. 


출발지까지 차로 이동한 시간을 빼고 나흘 간 250 킬로미터를 달렸습니다. 하루 평균 60킬로터 남짓 주행한 셈이죠. 고생스럽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습니다. 그동안 많은 곳을 여행해 봤지만 이번 자전거 여행이 제 인생에 가장 행복했던 시간으로 꼽힐 것 같습니다.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참 졸렬하게 살아왔는데, 이렇게 행복해도 되는 걸까요? 아마도 제게는 그럴 자격이 없겠지만 아이들이 발산하는 깨끗하고 역동적인 에너지가 각질의 껍데기를 깨고 들어와 중년의 메마른 가슴을 적시었으리라 짐작합니다.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성공했다. 삼십여 년 전 청운의 꿈을 품고 상경한 어수룩한 청년은 수많은 좌절과 상심을 겪으면서 멀고 먼 길을 돌고 돌아 마침내 성공한 남자가 되었습니다. 잃은 만큼 얻었고, 의지와 노력만으로는 도달하기 어려운 깨달음의 고지에 올랐습니다. 




첫날


9월 30일 아침, 경험이라곤 전혀 없이 오로지 계획만 가지고 길을 떠났다. 나의 개인사에서 검증되지 않은 계획서를 손에 들고 불안에 떨어본 적은 거의 없지만 하나에서 열까지 책임을 져야 하는 단체여행은 다르다. 1톤 트럭에 자전거 열다섯 대를 실을 수 있을지부터가 의문이었다. 여의치 않으면 앞바퀴와 페달을 분리할 생각도 했지만 다행히 그런 수고 없이 자전거를 모두 실을 수 있었다. 드디어 출발! 아이들은 버스로, 나는 트럭을 타고 이동했다. 오후 두시, 자전거 종주의 출발점인 괴산군 조령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했다. 자갈이 깔린 산길은 축축하고 미끄러웠다. 가을구름, 소나무와 함께 자전거를 정비하고 바퀴의 공기압을 점검하다 보니 날이 저물었다. 걱정은 어른의 몫, 아이들은 쉴 새 없이 재잘대고 깔깔거렸다. 아이들의 웃음소리는 세상에서 가장 듣기 좋은 소리 중의 하나, 돌 위에 가만히 앉아 듣는 것만으로도 피로가 풀리는 것 같았다. 건우가 전염성 질환 때문에 못 와서 슬펐고, 보조교사로 참여해준 졸업생 어진이와 우성이를 만나서 기뻤다. 나중에 건우의 병은 오진이었음이 밝혀졌고 아침 출발 전에 합류한다는 소식이 왔다. 뭔가 일이 잘 풀린다는 느낌이 들었다. 최고 학년인 9학년 아이들과 멀고느린구름이 요리한 부대찌개와 밥을 맛있게 먹고 잠자리에 들었다. 믿음직한 내 새끼들, 한나까지 왔으면 더 바랄 게 없었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에 밤이 깊도록 잠이 오지 않았다. 싸르륵싸르륵 벌레 우는 소리만이 하염없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둘째 날


길고 긴 내리막길, 자전거 종주의 첫날인 데다 차가 다니는 길이어서 내내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었다. 내리막이 끝나는 지점부터 갈림길에서 멈추고 뒤처진 아이들을 기다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후미를 맡게 되었다. 동연이와 정민이를 보내고 한참을 기다리자 소나무와 함께 천천히 달려오는 민서가 보였다. 이렇게 해서 8학년 여학생 민서와 뜻하지 않은 동행이 시작되었다. 민서는 맹할 정도로 해맑은 아이, 짜증도 불평도 없이 묵묵히 페달을 밟는데 너무 느리다. 사슴처럼 긴 다리에 비해 안장이 낮은 듯싶었지만 자전거가 멈출 때마다 기우뚱거리는 게 불안해 보여서 그냥 놔두었다. 민서는 오르막이 나오면 주행을 포기하고 자전거에서 내렸다. 27단 기어는 무용지물이었다. 민서와 나는 점심을 먹기로 한 탄금대에 일행보다 한 시간 늦게 도착하였다. 점심을 먹고 민서를 데리고 일찍 출발하겠다고 하자 소나무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러세요. 그래봤자 5분이면 따라잡을 걸. 우리는 한 시간 후 자전거 휴게소에서 일행을 기다릴 때까지 내내 선두를 유지했다. 벤치에 앉아 깊고 푸른 남한강 물빛을 말없이 바라보는 민서의 가슴속에 뭔가 새로운 존재감이 조금씩 싹트고 있음을 그때까지도 나는 모르고 있었다. 내가 해준 일은 오르막을 앞두고 민서의 자전거를 세운 다음 오른쪽 기어를 2로 변속해 준 것뿐이었다. 꼭대기에 오른 후에는 다시 오른쪽 기어를 4로 바꿔주었다. 이 동작을 반복하다보니 민서가 드디어 기어의 속성을 깨닫게 되었다. 꽤나 긴 오르막을 한 번도 자전거에서 내리지 않고 끝까지 오른 민서에게 나는 말했다. 민서야, 저 길을 봐. 네가 올라온 길이야. 너 참 대단하다. 민서가 말했다. 역시 푸지와 같이 오길 잘했어. 푸지도 도움이 될 때가 있네. 웃지 않을 수 없었다. 하하하, 이 녀석 말하는 것 좀 봐. 그때부터 민서는 오르막이 나올 때마다 자전거를 세우고 스스로 기어를 조작하기 시작했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두번 째 숙소인 봉황산 자연휴양림에 도착할 때까지 민서는 두어 번 넘어졌고 여기저기 멍이 들었다. 닫는 모둠을 마치고 숙소에서 막 잠이 들었는데 핸드폰이 울렸다. 웬만하면 전화 안 하려 했는데, 우리 아이가 숙소 밖에서 혼자 울고 있답니다. 가을구름이 부스스 일어나서 교사 숙소로 아이를 데려왔다. 아이는 더우면 잠을 잘 못 잔다고 했다. 아마도 낯선 잠자리에 적응을 못하는 듯싶었다. 까맣게 잊었던 기억들이 두서없이 떠올랐다. 집 나가 정처 없이 떠돌던 시절 웅크리고 잤던 상엿집, 부옇게 밝아오는 프로방스의 지평선, 아침 이슬, 목마른 연애, 지나간 사랑.     





셋째 날 


봉황산 자연휴양림을 내려오는 가파른 길에서 민서가 넘어졌다. 길에 떨어진 밤송이를 피하느라 그랬다는데, 그런 것까지 피할 필요는 없음을 알려주지 못한 내 잘못이 크다. 무릎이 까진 것 같았는데 바지 밑단이 좁아서 무릎 위까지 올릴 수 없었다. 할 수 없이 지원팀에 민서를 부탁하고 일행에 합류하였다. 그 다음부턴 주로 정민이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달렸다. 정민이는 올해 7학년으로 편입한 다크호스. 아직 나를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자전거 안장이 조금 높은 것 같아서 낮춰주었다. 자세가 훨씬 편안해졌다. 정민이와 나란히 달리면서 나의 젊은 시절 얘기를 해주었다. 20대 초반,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을 받은 적이 있다. 장파열. 부모님에게 알리지 않고 친구가 수술동의서에 사인했다. 의사가 관료주의적 절차를 따지는 사람이었다면 나는 아마 죽었을 것이다. 점심 먹는 지점까지 지원팀 차량을 타고 이동한 민서는 다시 자전거를 타겠다고 했다. 자전거에 재미가 단단히 들린 모양이다. 여주 강천댐에서 이포댐까지, 민서와 행복한 동행이 재개되었다. 나는 민서와 나란히 달리면서 편하게 말했다. 민서야, 기어 바꾸는 거 어렵지 않지? 자, 5로 바꿔볼래? 덜커덕, 체인이 새로운 기어로 바꿔 타는 소리가 기분 좋게 울펴 퍼졌다. 오케이, 성공! 이번에는 6, 그렇지, 왼쪽으로 한 칸. 속도가 더 빨라졌지? 쭉쭉 나가잖아. 이래서 기어변속이 필요한 거야. 저기 오르막이 보이네. 오른쪽 기어를 몇 단으로? 2단. 맞아 맞아. 자, 해보자. 힘껏 밟으며 탄력을 붙이는 거야. 5단으로 바꿔. 덜커덕. 4단으로, 덜커덕. 다시 3단, 덜커덕. 잘한다. 이번엔 2단! 덜커덕, 잘했어! 계속 밟아. 더 세게! 속도가 점점 떨어졌지만 민서와 나는 마침내 언덕 꼭대기까지 멈추지 않고 한 번에 오를 수 있었다. 민서는 기어 조작법을 완전히 터득했다. 제법 가파른 오르막을 완주한 민서가 산들바람에 땀을 식히며 꿈꾸는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푸지, 왠지 모르지만 행복해. 아, 나는 그 순간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다. 두둥실 새하얀 조각구름이 무심한 눈빛으로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이 광활한 우주 속에서 우리는 찰나적이고 먼지 같은 존재에 불과하지만 어쨌든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우주의 중심. 민서와 나는 생생한 의식의 한가운데에 서 있었다. 나는 민서의 자전거 안장을 조금 높여 주었다. 척 보기에도 쭉쭉 뻗는 두 다리에 힘이 실리는 것 같았다. 오늘부터는 거친 야생의 삶, 세번 째 숙박지인 이포댐 오토캠핑장에 이르자 먼저 도착한 교사와 아이들이 텐트를 치고 있었다. (주)하림에서 협찬한 삼계탕 40팩을 데워서 저녁식사를 하였다. 빈말이 아니라 정말 맛있었다. 뼈까지 아삭아삭 씹어 먹고 국물도 남김없이 핥아먹었다. 밤하늘엔 구름 한 점 없고, 바람에 쓸리듯 별똥이 우수수 떨어졌다. 



넷째 날


자전거 주행에 자신감이 붙은 민서는 저만치 앞서가고, 나는 지혁이와 함께 맨 뒤로 처졌다. 동연이와 민권이가 일행을 놓치고 딴 길로 새는 바람에 가을구름과 소나무가 찾으러 나섰다. 다행히 전화 연락이 되었고 둘은 돌아왔다. 시간이 너무 지체되어서 가을구름과 두 아이는 점심을 못 먹었다. 나는 낙오한 아이를 지원팀에 인계하기 위해 주행을 멈추고 삼십 분 정도 길에서 기다렸다. 차를 몰고 온 지원팀 풀꽃이 푸른지네도 차를 타고 가는 게 어떠냐고 물었지만 즉각 사양했다. 여기까지 와서 완주할 기회를 버리다니, 나는 아이의 자전거를 차에 실어준 다음 처음으로 맘껏 속도를 내고 달렸다. 왕숙천 자전거도로로 접어든 후에도 쉬지 않고 힘껏 페달을 밟는데 누군가 짝짝 박수를 쳤다. 소나무가 기다리고 있었다. 문득 가슴이 따뜻해졌다. 네번 째 숙소인 남양주 임송 캠프장, 세상에서 가장 맛있는 삼겹살이 기다리고 있었다. 강이 아버지, 미소 아버지, 동연 아버지가 고기를 굽고 저녁을 준비해 주셨다. 아이들이 좋아라 하며 먹는 모습만 봐도 배가 불렀다. 다섯 명의 자원자들이 깔끔하게 뒷정리를 해주었다. 마지막 밤이어서 소감을 나눴다. 대부분 시간이 너무 빨리 가서 아쉽다고 했다. 나는 어둠 속에 홀로 앉아 민서에게 배운 대로 중얼거렸다. 왠지 모르게 행복해. 




마지막 날


텐트를 접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사진 담당은 졸업생 김어진 군이다. 어진이는 『도시 소년이 사랑한 우리 새 이야기』라는 책의 저자인데 내 블로그에 소개한 적이 있다(http://blog.naver.com/jeffhyun/10136626239). 오늘은 평이하고 짧은 코스, 험한 고비는 다 넘겼다. 뚝섬 근처에 있는 뚝도시장에서 형석이 외할머니께서 사 주신 점심을 맛있게 먹고 다시 출발했다. 종착지까지 30킬로미터, 아이들과 시시덕거리며 장난치는 여유도 생겼다. 영보와 정민이의 목덜미를 나뭇잎으로 간지럽혔고 근희가 먹는 에너지바를 뺏어 먹었다. 민서는 놀랍게도 선두를 자청하더니 난지도까지 내내 잘 달렸다. 방화대교 북단을 지날 때부터 뒤로 처지긴 했지만 경탄할 만한 선전이었다. 마침내 경의선 화전역. 나는 민서를 앞세우고 서른 명 중 맨 꼴찌로 천천히 입성하였다. 박수와 환호는 덤이었다. 자전거를 세우고 헬멧을 벗는 순간, 다치거나 아픈 사람 없이 여기까지 왔다는 사실보다 중요한 것은 없었다. 시행착오도 있었다. 그것도 자산이다. 250킬로미터를 완주한 경험은 아이들에게 두고두고 힘이 될 것이다. 그들은 의지와 노력으로 더 나아질 수 있음을 입증하였다. 우리 파주자유학교, 사랑스러운 영웅들에게 가슴 활짝 축하를 보낸다.



2013. 10. 5. 















날짜

2014. 2. 21. 0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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