뇌 과학 관련 책(<나는 결심하지만 뇌는 비웃는다>)을 읽다가 책 말미의 부록에서 재미있는 실험 사례를 읽었다. 위 책 저자가 주관한 실험은 아니고, <사이콜로지컬 사이언스>라는 과학지에 실린 논문에서 소개된 실험이라고 한다.
실험 내용을 보면 우선 실험참가자들을 '채점자'와 '응시자' 두 그룹으로 나눈다. 그 다음 모든 실험 참가자들에게 당첨금이 20달러이고 당첨 확률이 50%인 복권 추점을 하게 하면, 실험 참가자들은 '채점자'와 '응시자'라는 역할 구분 외에 '부자'와 '가난뱅이'라는 두 범주가 다시 생성된다. 이렇게 되면 가능한 조합의 수는 4가지로, 부자 채점자와 부자 응시자, 부자 채점자와 가난한 응시자, 가난한 채점자와 부자 응시자, 가난한 채점자와 가난한 응시자의 네 범주로 구별할 수 있다.
그 상태에서 응시자들은 철자의 순서를 바꿔서 단어를 만드는 문제들을 풀었고, 채점자가 채점을 했다. 맞고 틀리고가 정해져 있는 문제들이었지만, 연구자들은 채점자가 행한 채점 결과를 문제 제기 없이 그대로 인정하기로 했고, 따라서 채점자가 응시자의 점수를 실제보다 높게 채점하면 응시자는 받을 자격이 없는 돈을 받게 되고, 채점자가 응시자의 점수를 실제보다 낮게 채점하면 응시자는 마땅히 받아야 할 돈을 받지 못한다.
실험결과, 1) 부자 채점자와 가난한 응시자 조합 - 채점자가 응시자를 도와주기 위해 70%의 조합이 실제보다 훨씬 높게 채점.
2) 부자 채점자와 부자 응시자 조합 - 90%가 정직하게 채점.
3) 가난한 채점자와 가난한 응시자 조합 - 채점자가 응시자를 도와주기 위해 95%가 실제보다 높게 채점.
4) 가난한 채점자와 부자 응시자 조합 - 30%의 채점자가 응시자에게 실제보다 낮은 점수를 줌.
[이중 4)의 경우는 30%밖에 안 되어서 수치상으로만 보면 크게 문제될 것 없어보이지만, 실제보다 낮은 점수를 주는 행위는 응시자로부터 반박 당할 위험을 감수해야 한다는 점도 있는 데데가, 누구의 눈에도 상대에게 해를 입히는 결과를 가져오는 준 범죄행위란 점에서 사실 30%가 이런 공격성을 보였다는 건 놀라운 수치에 다름 아니다. ]
마지막으로 연구자들은 이런 실험 결과에 대해 "사람들은 자기가 상대방보다 가난할 때 상대방에게 해를 끼치는 부정직한 행동을 많이 하고,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부정직한 행동을 덜 한다. 반대로 자기가 상대방보다 부자일 때 상대방에게 도움이 되는 부정직한 행동을 더 많이 한다."고 평가했다. 그리고 이 실험을 소개한 이 책의 저자는 " 이 연구를 통해 우리는 인간이 결코 합리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다시금 깨닫는다. 상대방을 이롭게 하는 쪽이든 해롭게 하는 쪽이든 부정직한 행동을 유발하는 동기는 ... 감정적인 반응이었다"고 적었다.
보다시피 단 20달러의 빈부격차에도 정직이나 객관성, 공정성은 온데간데 없고 긍정적인 감정(소위 말하는 인정)이든 부정적인 감정이든 감정이 상황을 지배한다. 그렇다면 단 20달러가 아니라 심각한 빈부격차가 존재하는 사회라면? 거기다가 미국처럼 적어도 겉으로나마 합리성이 사회를 이끄는 주요 가치로 자리잡지 못하고, 오히려 고도 자본주의 단계인 지금도 자본주의적 합리성보다는 전근대적인 온정주의와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이 용인되고 있는 우리 사회 같은 경우라면?
사실 우리 사회에서라면 대중여론상으로(비공식적으로) 욕을 듣기 쉬운 쪽은 1)번 조합의 경우, 채점자가 부자인데도 가난한 응시자를 위해 뭔가 도움을 주지 않은 나머지 '냉혹한' 30%의 사람들일 것이고, 3)번 조합의 경우, 점수를 조작하지 않은 나머지 '정직한' 5%의 사람들이기 쉽다. [더우기나 우리나라 사람들을 상대로 실험을 하면 비율 자체가 달라질 것이다.]
그리고 반사회적이고 부도덕하다는 점에서 가장 문제가 되는 경우가 4)의 30% 사람들임메도 불구하고, 오히려 이들에 대한 단죄는 필요한 정도보다 경감되어 나타날 것이다. 이것의 대표적인 사례가 대도 조세형 사건이다. 대중들은 자신이 도둑맞은 돈과 보석의 주인이라고 나서지도 못할 정도로 구리고 부패한 부자들의 소유물을 가난한 조세형이 훔쳤다는 사실만으로 그를 대도 혹은 의적이라고 칭했다. 조세형이 대중들의 숨겨진 분노와 욕망을 구현해주는 대변자 역할을 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세형이 한 행동이 우리 사회의 불의에 맞서는 의로운 행동이 아니라 한낱 도벽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드러났을 때, 대중은 자신들의 환상을 깨지 않기 위해 이 사실을 외면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약자인 가난한 채점자의 부도덕한 행위를 비난하는 것이 문제해결의 지름길은 아닐 것이다. 사실 위의 통계로는 드러나지 않지만, 만일 1), 2)의 경우에, 다시 말해 이미 기득권이 있는 부자 채점자가 가난한 응시자이든 부자 응시자이든 해를 입히는 경우가 있었다면, 즉 실제보다 낮게 채점을 한 경우가 있었다면, 아마 이 경우야말로 도덕적으로나 법적으로 가장 우선적으로 비난받아 마땅할 것이다. (아마 우리나라는 이런 사례가 미국보다 많을 것이다.)
게다가 문제가 복잡해지는 건, 4)의 30%가 자신의 공격적이고 부도덕한 행위에 대한 변명으로 내세우는 것이 조세형 사건에서도 보듯이, 부자들의 부도덕한 행위, 즉 부자들이 정당하지 못한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아마도 약자에게 해를 입히면서) 사례들이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실제로 상당 정도 있었고, 지금도 있다는 데 있다. 이 경우 4)의 30%가 행하는 잘못된 행위는 사이비 '정의'라는 가면으로 포장될 수 있다.
그리고 이로 인해 조세형 사건과 달리 정말로 억울한 피해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이것의 대표적인 사건이 타블로 학력위조 여부에 대한 타진요의 공격이다. 그리고 나는 유명 연예인들이 외국에서라면 연예인으로서의 특성상 그리 문제 되지 않았을 작은 부도덕함 때문에 네티즌들에게서 공격받는 사건이 유독 우리나라에서 자주 발생하는 것 또한 4) 번 조합에서 30%의 가해자에 대한 우리 사회의 '관대함' 때문이라고 본다.
타블로 사건이 가장 기승을 부리던 뒤늦은 시점에 처음으로 인터넷에서 타진요 회원들의 글과 타블로 지지자들의 글을 함께 읽게 된 나는 솔직히 말해 경악했다. 내 보기에 타진요의 주장은 감정적일 뿐, 전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보이는데 그 많은 사람들이 그토록 감정적인 타진요의 글들에 동조했다는 사실이 정말 놀랍고 걱정스러웠다. 게다가 사실관계는 놔두고라도 자칫하면 살인에까지 이를 정도의 심각한 언어적 폭력을 그 많은 사람들이 눈앞에서 뻔히 보면서도 피해자의 안위를 걱정하기는커녕, 그 폭력 상황을 방조하거나 타진요의 광기가 두려워 입을 닫거나 중립적인 척하면서 은근히 동조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한마디로 한국판 마녀사냥이었다.
이외수 선생을 비롯한 소수 네티즌들의 용기 있는 발언과 엠비씨 피디수첩의 신중하면서도 합리적 접근 덕분에 이 사건은 얼마 후 다행히 국면의 전환을 맞을 수 있었지만, 우리 사회가 사이비 '정의' 에 얼마나 취약한가를 잘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그리고 소위 말하는 진보세력들이 이런 사이비 '정의'에 얼마나 취약한지도 다시 한번 확인되었다.]
현대사회에 들어 소위 말하는 대중은 막강한 힘을 가지게 되었다. 연예인을 스타로 만드는 것도 대중이고, 정치가를 권력자로 만드는 것도 대중이다. 스타였던 연예인을 하루 아침에 폐인으로 만들 수 있는 것도 대중이고, 권력자였던 정치가를 권좌에서 끌어내릴 수 있는 것도 대중이다. 때문에 방송사들은 시청률에 벌벌 떨고, 정치인들은 지지률에 벌벌 떤다. 말하자면 대중에게 아부를 하는 것이다. (이를 정치에서는 대중영합주의라고 부른다.)
그런데 여기에는 두 가지 문제가 있다. 하나는 현대의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에게 의사결정권을 준 것은 그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독립적이고 객관적으로, 또 공정하게 판단할 능력이 있는 시민 혹은 국민으로 규정했기 때문이지, 시민이 모여서 대중이 되는 상황을 전제로 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리하여 대중의 일원으로서 갖게 된 판단과 감정이 시민으로서 가져야 할 판단과 감정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가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그리고 둘째로 시민 혹은 국민으로서 결정권의 범위와 결정 방식은 선거 등으로 한정되어 있지만, 대중으로서 결정권의 범위나 결정 방식 등은 아무것도 규정된 것이 없기 때문에, 상황 상황마다 힘의 관계에 따라 고무줄 길이처럼 달라진다는 점이다.
본래 대중은 아무런 힘을 갖지 않기로 되어 있었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가 되면서 권력과 자본은 사회구성원을 개개인으로 파악하고 장악하기 위해 전통적인 공동체 사회를 파괴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현대사회에서 가족은 핵가족화되고 개인은 원자화되었다. 하지만 자본주의의 예상과 달리, 국가-시민, 자본-노동력 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백이 생기게 되었다. 전통적인 공동체가 담당하던 사회, 문화, 종교 영역 등이 그것이다. 대중이라는 비공식적이고, 실체는 없지만 그러면서 분명히 실재하는 집단 범주가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 이런 영역들에서이다.
이전의 전통사회들에서는 공동체에 나름의 체계가 있었고 공유된 가치가 있었다. 따라서 공동체에 속한 구성원들, 즉 대중의 행동과 가치를 조절하고 규제하는 것이 어느 정도는 가능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공동체라는 틀이 없어진 대중은 마치 뚜껑이 열린 판도라의 상자와도 같다. 그것은 1848년의 빠리꼼뮨처럼 반혁명을 돌파하는 진보적 파워로 작용하기도 하고, 1890년대의 드레퓌스 사건이나 나찌즘에서처럼 독재세력의 호위병이 되기도 한다. 왜냐하면 대중을 움직이는 힘은 이성이 아닌 감정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번 움직이기 시작한 대중의 감정은 아무리 위대한 지도자라도 제어하기 힘들며, 피를 봐야 끝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야기가 많이 우회했지만, 다시 되돌아가서 나는 위의 조합 4)의 30%에 대해 혹시 '그럴 수도 있지 뭐'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곰곰히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나아가 조합 1)의 70%와 조합 3)의 95%라는 대중적 감정에 대해 아무런 문제의식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참 착한 사람들이군. 나라도 그러겠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또한 다시 생각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사실 위 책의 저자는 조합 1)의 경우에 해당하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하고, 위 실험을 소개한다.
"당신이 여러 직원들과 함께 한 사무실에서 일하고 있다고 치자. 이 회사에는 직원들의 실적을 평가하는 직무 수행 기준이 있다. 당신은 회사에서 최고로 꼽힐 만큼 실적이 좋은 사람 중 하나다. 그런데 부하 직원 중 웬델이라는 남자가 있다. 당신은 웬델을 볼 때마다 안타까움이 앞선다. 직무 수행 기준에 한참 못 미쳐서 늘 금방이라도 해고 당할 처지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당신은 웬델이 제대로 쉬어본 적도 없이 열심히 일하는 좋은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한 번만 더 기회를 주면 슬럼프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다.
어느 날 당신은 웬델과 함께 팀을 구성해 프로젝트를 진행하다가 웬델이 아주 중요한 보고서를 망쳤다는 걸 알아챈다. 누구라도 이 사실을 알게 되면 웬델은 당장 해고당할 게 확실할 정도로 큰 건이다. 하지만 아직까지 이 사실을 아는 사람은 당신뿐이다. 당신에게 웬델의 실수를 덮어줄 기회가 생겼다. 만일 당신이 이 일을 덮고 웬델이 아니라 당신이 잘못한 거라고 거짓말을 하면, 회사에서는 그간의 실적을 생각해서 당신을 징계하지 않을 테고, 웬델도 회사를 계속 다닐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만일 당신이 이 일을 덮지 않고 다른 사람들이 알게 놔두면 웬델은 그대로 해고당할 게 뻔하다. 자, 어떻게 하겠는가?"
보다시피 이 경우 당신이 덮어준다면 1)번 조합의 70% 사람들이 취할 행동방식과 비슷한 방식일 것이다. 나로서는 이 글을 읽는 여러분이 어떻게 할지 몹시 궁금하지만, 현재로서는 우선 내 입장을 먼저 밝히는 것이 예의일 것 같다. 먼저 예전의 나라면 아마 웬델의 실수를 덮어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생계와 관계없는 활동을 하던 더 예전의 나라면 그러지 않았을 확률이 더 크다.) 그런데 대안학교 교장직을 6, 7년 해본 지금의 내 상태는, 머리로는 웬델의 실수가 다음번에는 고쳐지리라는 보장도 없고, 웬델로 인해 다른 사람들이 피해를 입고 있다는 사실을 알기에 이 일을 덮지 않는 것이 맞다고 생각하면서도, 과연 그런 '냉철한' 행동을 나 자신이 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그럼에도 지금의 나는 나의 자신 여부와 상관 없이 옳은 행동은 그 일을 덮지 않는 쪽이고, 혹시 내가 동정심에서 그 일을 덮는다면, 나는 어리석게 행동하고 있는 것임을 안다. 왜냐하면 대안학교 교사로서 내가 겪은 현장은 한 사람의 무능력과 이에 대한 정당하지 못한 관용이 결국 나머지 다른 사람들에게는 피해로 돌아간다는 사실뿐만이 아니라, 1)번과 3)번의 선의가 오히려 웰든 같은 사람을 4)의 고의적 가해자(30%)로 만드는 토양으로 작용하는 인간 심리를 여러번 경험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물론 내가 사소한 한 두번의 실수까지 엄격하게 책임을 물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아무리 중대한 실수라도 그것이 고의성이 없는 실수인 한 적어도 두 세번의 기회는 더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경험에서 배운 건 조건 없는 무한한 선의가 오히려 악을 양산하는 밑거름으로 사용될 수 있는 게 현실이라는 뼈아픈 깨달음이다.
어쨌든 저자의 위 질문에 대한 여러분의 입장은 어떠신지? [솔직히 우리 댓글도 좀 달아주고 그럽시다 ㅎㅎㅎ]
2013. 3. 25. 금안당
* [대안 시선]에 업로드되는 글은 파주자유학교 전체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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