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처럼 사람은 태어나서 조금이라도 세상에 적응하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억울해하고 화를 낼 수 있다. 아이가 이런 상황을 한 번도 겪지 않는 게 가장 좋은 일이겠지만, 부모도 사람인지라 이렇게 되기는 사실상 불가능하다. 또 억울한 경험, 화 나는 경험이 아이의 성장에 부정적 영향만 끼치는 것은 아닌지라, 오히려 부모가 할 일은 아이가 이런 경험을 겪더라도 화가 최대한 쌓이지 않도록 노력하는 것이다. 말하자면 아이의 화를 푸는 것이다. 내가 관찰한 바로는 사람이 화가 풀리는 과정은 몇 가지로 분류할 수 있는 것 같다.
첫번째는 이미 엎질러진 물, 즉 이미 발생한 일에 대해서는 아이에게 감정적 상처를 준 것에 대해 사과하는 방법이다. 이때의 사과는 잘잘못을 평가한 결과가 아니라 위로다. 억울함이 잘잘못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서 나온 감정이 아니듯이 이 억울함에 대한 위로 또한 잘잘못과는 관계가 없다. 그래서 이 때의 사과는 길 가던 두 사람이 각각의 부주의로 부딪혔을 때, 아니 부딪혔다고 느껴지는 그 순간, 우리 입에서 나오는 말 “아! 미안합니다.”와 흡사하다. 알다시피 서로 부딪히고 나서 이 말을 했을 때와 하지 않았을 때는 그 다음의 상황 전개에서 판이하게 달라진다.
피해 입힌 것에 대해 위로 혹은 사과를 하는 이 방법은 억울함이 화로 발전하는 것을 막아준다. 이 방법은 사건이 벌어진 그 현장에서도 효과가 있고, 한참 시간이 지나서 상대방이 당시의 억울함을 토로할 때도 똑같이 효과가 있다. (물론 진심이어야 한다.) 사과는 억울함과 분노로 닫혀 있던 상대방의 마음을 풀어준다. 잘잘못을 따지는 것은 상대방의 마음이 이렇게 열려지고 나서야 의미가 있지, 상대방이 억울하고 화난 감정에 휩싸여 있으면 옳고 그름은 따질 여지가 없다.
그런데 화를 푸는 데 있어 이 방법의 한계는 그것이 해당 개별 사건에 대해서만 오해가 풀린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 방법은 화가 아직 거의 쌓이지 않은 어린 아이들에게 적합하다. 게다가 이 방법은 화를 내게 만든 사람이 직접 사과를 해야 한다는 것도 한계다. 예를 들어 아빠의 행동에 억울해하는 아이에게 엄마가 아빠의 행동에 대해 아무리 변명해주어도 아이의 화를 풀어주는 데는 한계가 있다. 엄마의 변명은 아이의 화를 누그러뜨려주긴 하지만 화를 풀어주지는 못한다. 또 이 방법의 한계는 아이 스스로 화를 다스리거나 풀 능력을 키워주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효과는 있지만 누군가가 풀어줘야 한다.
두 번째 방법은 시간이 훨씬 많이 걸리고 포괄적이지만, 결국에는 아이 스스로 화를 풀어낼 힘을 키워주는 방법이다. 그건 억울하다는 감정이 성급하게 일어나는 걸 차단하는 방법이다. 예전에 운전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이따금 인도쪽 차선에서 앞서가던 다른 차들이 바로 옆의 내 차선쪽으로 머리를 밀고 들어올 때가 있었다. 안 그래도 초보라 긴장하고 있는 상황인데 옆 차선에서 멀쩡히 잘 나가던 차가 갑자기 내 차선으로 끼어들기를 하니 놀라기도 하고 화도 났다. 그런데 몇 번 같은 일을 당하고 자세히 보니, 인도쪽 차선에 정차한 버스나 수레, 오토바이 같은 장애물들이 있었다. 인도쪽 차선으로 달리던 차들은 갑작스런 장애물에 급 브레이크를 밟기보다는 옆 차선으로 끼어드는 게 더 낫다는 본능적 판단을 했던 것이다. 이렇게 이해를 하고 나니 그후로는 다른 차가 갑자기 내 차 앞으로 끼어들어도 순간 ‘어? 어? 뭐야?!’ 하다가도 금방 ‘아, 무슨 이유가 있겠지’하면서 긴장이 풀렸다. (운전이 점점 능숙해지면서 여유가 생긴 배경도 있겠지만 ㅎㅎ)
말하자면 상대방을 오해하지 않고 이해하려고 애쓰는 것, 내가 모르는 어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여기는 것, 명확한 증거가 있지 않는 한 상대방을 단죄하지 않는 것이다. 이렇게 하면 과거의 화를 지우지는 못하더라도 더 이상의 불필요한 화가 쌓이는 것을 스스로의 힘으로 예방할 수 있다. 나아가 과거에 쌓인 화를 다른 시각에서 볼 수 있게 됨으로써 자신이 극복해야 할 문제임을 자각할 수 있다. 이 방법은 한 마디로 화가 잘 쌓이는 사고방식을 화가 잘 안 쌓이는 사고방식으로 바꾸는 것이다. 말하자면 감정적 판단이 아닌 이성적 판단을 하는 것이다.
이 점에서는 섬세한 측면에서 부모가 아이를 어떻게 길렀는가가 중요하다. 즉 어떤 일의 결과에 대해 부모가 남 탓이나 상황 탓을 하는 걸 아이가 자주 보게 되면 아이도 점점 그런 시각으로 세상을 해석하게 된다. 예컨대 아기가 돌부리에 걸려 넘어졌다. 우는 아이를 달래려고 “이 놈의 돌멩이! 땟지!”라고 하면서 돌맹이를 혼내주는 시늉을 하거나 “아니, 누가 여기다 돌멩이를 갖다 놓은 거야?”라면서 화를 내는 부모들이 있다. 이렇게 되면 아기는 넘어져 아픈 것에 대해서는 잠시 감정적인 위로를 받을지 몰라도, 돌부리에 걸려 넘어진 그 실패 경험에서 남 탓 하는 걸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다.
반면에 아기가 부주의했던 것에 대해 화를 내는 부모도 있다. 이런 경우는 아기에게 과도한 능력을 요구하는 것이 되어 아기는 자신의 무능력을 탓하고 반복되면 자신감이 없어진다. 하지만 이 상황은 누구의 탓도 아니고, 그냥 그럴 수 있는 일에 지나지 않는다. 아기는 넘어지면 아프다는 경험을 해보는 걸로 족하다. 앞으로 좀더 조심을 할지 말지는 아기가 알아서 할 몫이다.
부모들이 헷갈리는 건 어른이 어설픈 동작 때문에 엉덩방아를 찧으면 창피하듯이, 아이들도 자신이 넘어진 걸 창피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창피한 걸 모면하기 위해 실제 아픈 것보다 더 크게 울 수 있다. 아기가 서럽게 울면 부모는 뭔가 확실한 반응을 해줘야 할 것 같은 다급함을 느낀다. 그래서 부모 자신도 말도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돌멩이를 혼내주는 시늉을 하거나 허공의 제 3자에게 화를 내는 시늉을 한다. 혹은 ‘이성적’인 부모는 아기의 오버에 속지 않고 오히려 화를 내는 것으로 오버를 한다. 결국 어느 경우나 아무렇지도 않은 일상적인 사건이 부모의 개입으로 확대되고 만다.
(오래 전에 프랑스인지 독일인지의 어느 유치원에서 보여진 한국인 엄마와 유럽 엄마의 차이에 대한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유럽 엄마들은 아이가 제 힘으로 신발을 신도록 기다려주는 반면에 한국 엄마들은 그렇게 기다리느니 차라리 아이 신발을 엄마가 직접 신겨주고 만다는 차이였다. 이 경우에도 아이가 자기 리듬대로 자기 일을 해결해가도록 내버려두는 것이 정답이다.)
그러니까 부모의 개입과 판단이 없었다면 아이는 남 탓도 자기 탓도 할 필요가 없었고, 따라서 억울함이나 자괴감을 불러올 사고방식을 가질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억울함과 분노(자신에 대한 분노를 포함하여)를 쉽게 유발할 수 있는 사고방식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해보자. 그럴 때 이 사고방식을 어떻게 깰 것인가? 답은 하나이다. 아이 스스로가 지금까지의 자기 판단이 틀렸을 수 있다는 걸 깨달아야 한다. 어떻게? 아이가 사실을 관찰하게 해서.
물론 처음에는 아이가 기존의 선입견에 가로막혀 사실을 사실대로 보려고 하지 않을 것이다. 초보 운전일 때의 내가 다른 차가 내 앞으로 밀고 들어오는 걸 무조건 끼어들기라고만 예단했을 때 그 차가 밀고 들어오게 된 정황에 마음을 쓸 여유가 없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사람이 무단히 남에게 피해를 입히는 일은 거의 없다’는 평소의 내 믿음이 사실을 사실대로 관찰할 여유를 내게 주었고, 덕분에 운전하면서 화가 더 쌓이거나 하는 일이 많이 줄어들 수 있었다. 예전에 김수환 추기경 시절에 가톨릭 신자들이 ‘내 탓이로소이다’라는 표어를 차 등에 붙이고 다닌 적이 있다. 이 또한 사람들이 섣부르게 화를 내는 상황을 막아줄 수 있는 좋은 방법이었다.
하지만 아이들은 아직 어려서 무슨 확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므로, 혼자 힘으로 이렇게 해내기가 힘들다. 그럴 때는 아이가 신뢰하는 사람(부모와 교사 등)이 중개 역할을 해서 아이가 사실을 사실대로 관찰할 수 있게 끌어줄 수 있다. (하지만 부모는 부모로서의 감정적 편향이 있고 한쪽 당사자인 경우가 많아서 이렇게 하기가 쉽지 않다.) 한 번, 두 번, 세 번... 마지못해서라도 억울하고 분노한 마음을 잠시 접고 사실을 사실대로 본 경험이 쌓이면, 아이의 사고방식이 새롭게 형성되기 시작한다. 주관적 감정적 판단이 줄어들고 그만큼 억울함과 분노가 쌓이는 일도 줄어든다. (대안학교가 아이의 관계맺기 영역에서 하고 있는 일이 이것이다.)
남 탓을 하지 않게 되면 긍정적 마인드가 형성된다. 문제에 봉착하면 화를 내기보다 그 문제를 해결하는 쪽으로 주의를 기울인다. 말하자면 ‘부정’이 아니라 ‘대안’에 중점을 두는 것이다. 남의 주장이나 말이나 행동의 문제점을 지적하고 부정하기는 상대적으로 쉽지만 대안을 제시하기는 어렵다. 대안을 제시한다는 건 내가 상대방의 위치에 있게 되면 어떻게 할지까지도 충분히 감안한 상태에서 자신의 역할을 설정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새롭게 형성된 자신의 세계관으로 과거의 사건들을 재평가할 수 있다. 물론 선입견으로 못 박혀 있는 것이라 관련 분노까지 풀려면 오랜 세월이 걸린다. 하지만 아이들의 경우는 다르다. 초등학생은 문제가 거의 되지 않지만, 이따금 부모에 대한 분노가 가득한 아이가 중등과정 이상으로 입학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 경우도 부모 자체에 대한 아이의 화는 1, 2년이면 해소될 때가 많다. 다만 아무리 대안교육이라 해도 1, 2년으로 사고방식이 바뀌지는 않으므로, 분노의 대상이 동료나 교사 등으로 옮아간다. 하지만 3, 4년 정도 대안학교에 다니다 보면, 화를 생성하는 사고틀이 무너지기 때문에 이 또한 과도기적 현상일 때가 많다. 반면에 어른이 되어서는 새로운 사고방식이 형성되는 데도 오래 걸릴 뿐 아니라, 과거에 쌓인 화가 완전히 해소되기까지는 10년, 20년의 시간이 걸릴 수 있다.
이 두 번째 방법이 이성의 합리성으로 화를 푸는 방법이라면, 세 번째 방법은 영적인 해결책이라 할 수 있다. 기도, 명상 등을 통해 자신의 무의식(영적) 세계에 접근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방식은 의도와 상관 없이 그 결과를 전혀 예측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기도나 명상을 통해 무의식 세계에 접근할 수는 있다. 하지만 기껏해야 3차원에 지나지 않는 인간의 인식으로는 4차원 이상인 이 영적 세계를 이해할 수도, 자신에게 도움 되는 방식으로 활용할 수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원대한 목표(득도 등)는 일단 접어두고 소박하게 정신건강을 개선하거나 유지하기 위해서 기도나 명상 등의 방법을 활용하는 것은 효과가 있다. 어떤 원리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기도나 명상을 꾸준히 하면 쌓였던 화가 많이 풀리는 건 확실하다. 이 때문에 대안학교들에서도 학생들의 심리적 상처를 치유하는 방법의 하나로 명상 등을 활용하기도 한다.
어떤 방법을 쓰든 화를 풀어야 한다. 며칠 전에 뉴스에서 사이버 공간에서 극우적 성향을 보이고 있는 ‘일베’ 사이트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다. 뉴스에서는 대책으로 현대사교육을 강화할 필요가 있다고 주장했지만, 내 보기에 그건 이념의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화의 분출인 것으로 보였다. 뉴스에 나와 이야기한 일베 회원 중 한 명은 자신들이 이 사이트 활동을 그토록 열심히 하는 건 진보 성향 사람들에게 자신들이 줄곧 무시당해온 것에 대한 분풀이라는 식의 주장도 했다. 다음날에는 인터넷에서 극소수이겠지만 전라도 사람들과 경상도 사람들이 사이버 전쟁을 하고 있다는 기사 제목도 보았다.
이처럼 화가 쌓인 개인이 많아지면, 그 화는 집단의 화가 되고, 그 사회는 패거리 싸움으로 넘쳐나게 된다. 그리고 행여라도 정치지도자가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이 집단 분노를 이용하게 되면, 히틀러의 독일제국이 그러했던 것처럼 나라 전체가 파국으로 떨어지고 말 것이다.
우리 사회는 화내려고 하면 화 낼 거리가 얼마든지 있는 사회인데, 문제는 이런 화의 분출을 제지할 수 있는 메카니즘이 법률 제도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다는 것이고, 나아가 더 문제는 교육 제도가 지금과 같은 상태여서는 우리의 미래 또한 장담하기 힘들다는 것이다. 대안교육을 통해 심리적으로 화가 덜 쌓인 건강한 청년들이 더 많이 배출되는 것이 개인적으로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할 것이다.
2013. 3. 15. 금안당
* [대안 시선]에 업로드되는 글은 파주자유학교 전체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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