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왜 대안학교 교장을 하겠다고 나섰던 거지?
- 금안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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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째의 경험은 우리 아이가 대안중학교인 실상사 작은학교를 1년여 다녔던 겨울방학 중에 있었다. 우리 아이는 3기 입학생이었는데, 2기 한 학부모의 두 번째 자녀가 4기로 입학을 하려고 하면서 사단이 벌어진 것이다. 중학 과정인 작은학교에는 형제입학 원칙이란 게 없었다. 그래서 아무리 재학생의 형제라도 하더라도 여타 신입생과 동일한 입학 전형 과정을 밟아야 한다.
문제는 아이가 아니라 부모였다. 작은학교 교사들이 2년간 지켜본 해당 부모의 모습이 교사들이 보기에 그리 만족스럽지 못했던 것이다. 교사들은 동생을 받아들이되, 이번 기회에 부모의 학교에 대한 태도가 좀 바뀌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가지고 있었던 듯하다. 그래서 약간 우회적인 표현을 사용하여 이런 바람을 근저에 깐 메일(? 편지?)을 그 2기 부모에게 전달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편지 속에 학부모라면 누구나 오해할 수 있는 표현(구체적으로 말하면 ‘위탁’이라는 표현이었다.)이 있었고, 교사들의 의도에 관계없이 그 용어는 해당 학부모를 화나게 했고, 나아가 해당 학부모가 2기 학부모 모임에서 그 편지를 공개함으로써 2기 학부모들 대다수를 화나게 했다.
우리 아이 아빠가 3기 학부모 대표였던 덕분에 2기 학부모들의 이런 동향에 대해 빨리 전해들을 수 있었다. 안 그래도 우리 아이가 고자학을 졸업하고 난 다음 해 학교의 분열을 졸업생 학부모로서 지켜본 경험이 있던 내 입장에서는 이 문제 상황이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판단했다. 3개 학년밖에 없는 작은학교에서 2기 학부모들 대다수가 학교에 등을 돌리거나 대표 교사를 비롯한 교사들의 책임을 추궁한다면? 이제 3년의 역사밖에 되지 않은 작은학교는 이 내풍(內風)에 살아남지 못할 것이란 불안감이 들었다. 그러면 우리 아들을 비롯한 작은 학교 학생들, 특히 3기 아이들에게는 대안학교를 선택한 것이 비극적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고 여겼다.
방학 중이었는데도 남편과 함께 대표 교사와 교사들을 만나러 갔다. 교사들은 2기 부모들의 불만을 잘 모르고 있었다. 그리고 위탁이란 표현을 2기 부모들이 어떤 느낌으로 가져가는지에 대해서도 이해를 하지 못했다. 교사의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가 대표 교사에게 부탁한 것은 서로 이해의 자리를 갖기 위해 학부모-교사 만남의 자리(야단법석)를 마련하자는 것이었다. 그 자리에서 서로 오해했던 부분은 풀고 사과할 부분은 사과하자고 했다. 합리적인 소통 없이 서로 각자 상대의 입장을 추정하고 예단하게 되면 서로간에 걷잡을 수 없는 확대 해석이 일어나, 나중에 가서는 만회하기가 힘들 것이라고 주장했다.
산청 간디학교 초기에 교사 - 학부모 간에 어떤 갈등이 있었는지를 잘 아는 대표교사는 이 부담스런 자리를 갖는 것에 마음을 내주었다. 교사들에게 따지고 싶었던 마음이 강했던 2기 부모들도 이런 자리를 갖는 것에 동의했다. 아직 1년밖에 작은학교를 다니지 않아 학교에 대해 불만보다는 학교가 위태로워지는 것에 대한 염려가 더 컸던 3기 부모들도 그 자리에 참석했고, 입학식을 코앞에 둔 신입 4기 부모들까지 포함하여 아이들과 교사들의 야단법석이 아니라 교사와 학부모의 야단법석이 처음으로 열렸다. 사회자는 2기 학부모 대표였다.
서로간의 잘잘못을 따지는 자리가 그렇듯이, 회의는 꽤 오랜 시간 긴장감이 흘렀고, 서로 자신의 정당성을 주장했다. 하지만 서로 많은 이야기를 하면서 구체적 사실 자료들이 드러났고, 덕분에 주관적 오해들이 하나둘씩 풀려가기 시작했다. 이것만으로도 참석자들 상당수가 각자 나름의 감정의 올가미에서 벗어나기 시작했고, 상황이 객관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사회자가 2기 학부모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정한 중립적 입장을 견지하기 시작하면서 실타래는 확실하게 풀리기 시작했다. 서로의 속마음이 선의에서 나온 것임을 확인했고, 그런 선의에도 불구하고 의도하지 않은 상처를 상대방에게 준 것에 대해 교사도 학부모도 사과를 했을 즈음에는 참석자들 사이에는 차분하면서 조용한 감동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물론 아직 학교의 내막을 거의 모르는 신입 4기 부모들에게는 끝까지 얼떨떨해하는 분위기가 남아 있었지만...)
물론 이 한 번의 야단법석 자리로 교사-학부모 간 모든 문제가 없어진 것도 아니고, 각자가 지니고 있던 이견이나 감정의 앙금이 완전히 지워진 것도 아니다. 우리가 이룬 것은 내용적 합의가 아니었다. 오히려 그 자리에서 우리가 합의한 것은 최저한의 기준, 즉 아이들을 위해 학교를 지키는 것이 우리 모두가 바라는 바란 것이다. 그리고 이 기준에서 교사가 학부모에게, 또 학부모가 교사에게 불만을 가지고 있더라도 그것을 어떤 식의 행동으로 표현할 것인지의 기준이 암묵적으로 동의되었다. 이 행동 기준을 굳이 언어로 표현한다면 아마 ‘대안이 확실하지 않다면, 학교에 대한 이견이나 불만을 확대시키지 않는다.’ 정도가 될 것이다.
그리고 이 자리는 다수의 참석자들이 이견이나 갈등이 있을 경우,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만을 듣고 판단하
지 않는다는 민주주의 토론의 기초를 배우는 기회이기도 했다. (아마 그외에도 참석자 각자가 가져간 배움의 내용은 여러가지가 있었을 것이다.) 나는 작은학교가 그후 몇 년 동안 기숙사와 학교 건물을 새로 짓기까지 하면서도 그다지 큰 분란이 일어나지 않고 버틸 수 있었던 데는 작은학교를 가장 적극적으로 후원해주시는 도법 스님의 법력 덕분이기도 하지만, 교사와 학부모 등 식구 구성원들이 가졌던 이런 기본적인 전제의 힘도 컸다고 본다.
여하튼 나는 이 과정을 거치면서 지금까지 내가 대했던 다른 어떤 집단에서도 경험하지 못했던 행복한 경험을 했고, 대안학교에 대해 놀라운 가능성을 느꼈다. 잘만 하면 서로 간에 진정한 이해와 합의에 도달할 수도 있다는 가능성 말이다. 나는 그 이유가 대안학교 관련자들은 교사든 학부모든 대안학교 선택이라는 누구도 강요하지 않은 자발적 선택을 한 사람들이고, 또 아이들을 걸고 한 선택이기에 그 선택이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할 수 밖에 없다는 사실에서 찾았다. 그 과정에서 설사 교사나 학부모 개개인의 양보와 희생이 요구된다고 하더라도 말이다.
사실 나는 성향상 주관적이고 비합리적인 상황을 싫어할 뿐 아니라, 이런 상황에 대해 대단히 무능력하다. 그래서 공동육아가 아이들을 위해 건강한 프로그램을 운영하여 상업적인 유치원이나 어린이집보다는 아이의 인성에 좋은 영향을 미치리라는 게 분명했지만, 공동육아의 경우에는 부모의 참여와 개입이 과하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공동육아에 아이를 보내는 것을 포기하고 말았다. 나는 책임 소재가 불분명한 사공이 많은 배는 가능하면 피하고 싶어하는 편이다.
그래서 6학년 때 아이를 대안학교에 보내기로 결심하고서도 처음에는 필요한 최소한의 일만 하겠다고 생각했다. 나를 포함한 학부모 몇 사람이 학교를 세운 것이니 고자학도 조합식 학교인 건 분명했지만, 내 경우에는 어차피 아이를 보낼 중등 대안학교를 결정해두고 있었던 터라 1년만 참으면 된다고 여겼던 것이다. 그런데 예상처럼 되지 않았다. 조합식 학교에서 교권과 친권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했고, 나는 성향상으로도 입장상으로도 교사들이 교권을 확보하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교사 주도였던 작은학교는 부모의 참여 요구가 훨씬 덜했다.(그래도 기숙학교이니만치 아이에 대한 모든 것을 이제 학교에 맡겨버리면 되리라고 생각했던 내 기대에는 훨씬 미치지 못했지만 ^^*) 하지만 아직 학교 시설이 미비한 시골의 기숙학교라는 점이 문제였다. 교사들의 힘만으로는 벅차서 작은가정 학부모 당번 등 학부모들의 도움과 손을 필요로 하는 일이 한 두 가지가 아니었다. 게다가 한 번 가면 2박 3일 정도는 기본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이런 지나온 이야기를 하면서 내가 하려는 말은 불평이나 불만이 아니다. 고자학 시절에도 그랬고, 작은학교 시절에도 아이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학부모인 나도 반쯤 학교를 다니는 형국이 되면서, 덕분에 대안학교란 게 뭔지, 대안교육이란 게 어떤 것인지를 경험할 수 있었다. 대안학교 교사들의 수고와 고생이 뒤얽혀 만들어낸 대안교육의 현장은 기대 이상의 감동일 때가 많았다. 이 때문에 우리 아이가 2학년 여름방학 때 방학을 연기하면서까지 5박6일간의 야단법석이 진행되었을 때는 나도 대안교육의 생생한 현장을 맛보고 싶어, 어느 학부모보다 먼저 산내로 내려가기도 했다. 또 대안교육을 받은 우리 아이가 이따금씩 보여준 의젓하고 대견한 모습 역시 내게서 뿌듯함과 감격을 자아내곤 했던 터라, 나는 갈수록 학교 일을 돕는 것을 의무나 수고로 여기기보다는 ‘my pleasure'로 여기는 심리로 바뀌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자자학교의 중등과정 설립 논의가 시작되었다. 내 보기에는 자자학교 독자의 중등과정을 굳이 설립한다면 당시 자자학교 교장이던 팬더 선생님이 중등과정까지 맡는 게 학교의 발전적 성장을 위해 좋겠다는 의견이었지만, 졸업을 앞둔 학부모들 다수의 의견은 달랐다. 전해 듣기로는 외부 영입을 추진할 태세였다. 하지만 교사회가 인정하지 않는 외부영입 인사가 초중등의 분열을 가져올 것만이 아니라 초등대안학교로서 지금까지 자자학교가 쌓아온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아마도 과도한 교사 주도 체계의 부작용이었을 것이다. 중등 과정까지 가서도 기존 교장과 교사들의 지휘를 받기는 싫다는...
일을 순탄하게 풀려면 교사회도 인정하고 학부모들도 거부 못할 사람이 필요했다. 달리 대안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고민 끝에 내가 대안학교 교사를 해보기로 했다. 아마도 아이를 처음으로 대안학교에 보내던 3년 전이었다면 이런 결심을 절대 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실 나는 사대 출신으로 교생 실습을 나갔다가 교사라는 직업이 얼마나 헌신을 요구하는지 깨닫고 내 평생 교사를 하는 일은 없을 거라고 작정했던 사람이다. 하지만 대안학교 학부모로서 보낸 3년이 내 철통 같았던 선입견까지 부수고 말았다.
7년 동안 대안학교 교장을 하면서 여러 가지 일들을 겪었지만, 이 글의 제목이 전하는 어감과 달리(^^* 확실히 제목이 적절하지 않아 ㅠㅠ) 교사를 하기로 한 결정을 후회해본 적은 별로 없는 것 같다. (정식으로 청미래 학교를 개교하기 전의 준비기간 동안에 한번 추진위원장 퇴진 의사를 밝힌 적은 있다.) 하지만 아쉬운 점은 있다. 교장 혹은 교사 역할을 해야 하다 보니, 교사-학부모의 화합을 일궈가는 문제에서 중재 역할을 할 수가 없었다는 점이다.
그러고 보면 공통의 목표를 위해 이질적인 두 집단 간에 건강한 교감과 이해에 이를 수 있다는 가능성에 반해서 대안학교 신봉자가 되었는데, 정작 직접적인 당사자가 되고 나서는 이 일을 해내기 힘든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게 좀은 아이러니 같기도 하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보면 파자도 이제 연륜이 오래 되어 나 아니라도 우리 학부모님들 중 여러 분들이 이 역할을 해주고 있는 게 아닌가! 내가 불안해하지 않고 퇴임할 수 있었던 것도 그 덕분이고...
그러고 보면 아직은 우리 학교가 '대안'적 삶의 탄탄대로를 개척하고 있다고 자부하기에는 이르지만, 그래도 겸손한 표현을 쓰더라도 '꽤' 잘해온 편이라고는 말할 수 있지 않을까?
2013. 3.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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