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풀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 1
- 금안당
십여년 전에 틱낫한 스님의 ‘화’라는 책이 꽤 긴 시간 초대형 베스트셀러가 된 적이 있다. 내가 그 책을 읽지는 않았지만, 그 당시 신기하게 생각했던 기억이 뚜렷하다. 그러니까 그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었다는 건 많은 수의 사람들이 ‘화’내는 것이 자신의 심각한 문제라고 여기고 그 해결책을 원하고 있어서란 이야기인데, 내 주위에서 화내는 것이 자신의 고민거리가 될 만큼 자주 화를 내는 사람을 거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닌 법. 더구나 나 자신의 감정조차 잘 식별을 못하는 내가 남들이 속에 지닌 감정을 어찌 파악하겠는가? 하여튼 우리나라 사람들이 감춰둔 화, 소위 말하는 울화가 많은 건 확실한 것 같다. 게다가 우울증이란 것도 세상에게든 남에게든 자신에게든 화가 나는 상태가 발전해서 얻게 되는 마음의 병인데, 요 십 몇 년 사이에 우울증에 걸린 사람들의 수가 급속하게 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런데 화는 왜 생기는 걸까? 설사 화가 인간이 타고나는 감정 중의 하나라 해도 모든 감정은 촉발하는 뭔가가 있지 않으면 촉발되지 않는다. 내 생각에 화는 ‘억울하다’는 생각이 들 때 생기지 않을까 싶다. 즉 당사자가 ‘억울하다’고 여기는 일을 당했을 때, 화라는 감정이 촉발되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촉발된 ‘화’라는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풀리지 않으면 계속 그 사람 안에 남아 있게 된다. 사람들은 감정은 일시적이어서, 시간이 지나면 없어진다고 생각하지만, 화의 경우는 그렇지 않다. 왜냐하면 화라는 감정은 생존 본능과 연관된 두려움에서 직접적으로 파생되는 감정이어서 편도체 등 대뇌변연계에 어떤 식으로든 자국을 남기기 때문이다. 사고 등 강한 두려움을 경험해본 사람은 유사한 상황이 재발하면, 이성적 해석에 관계 없이 예전과 똑같은 두려움을 느낀다. 한 번 자동차 사고를 당한 적이 있는 사람이 자동차를 다시 타기가 쉽지 않은 것이 이 때문이다. 같은 일이 재발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고 아무리 이성이 설득을 해도 두려움의 감정에서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
화 혹은 분노 또한 직접적인 두려움만큼은 아니라도 이성적 처리의 손이 닿지 않는 대뇌변연계에 흔적을 남긴다. 분노의 감정이 강했을수록 남는 자국도 뚜렷해진다. 문제는 한 번 생긴 상처는 치유과정이 없으면 저절로 나아지는 법이 없고, 오히려 곪아가기만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화가 쌓이면 이제 그 화는 애초 자신에게 화를 불러일으켰던 대상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풀리지 않은 화는 이제 아무에게나 향해진다. 그야말로 자신 속의 분노한 자아는 ‘아무나 걸리기만 해봐라’는 상태가 된다.
대안학교를 하면서 절실히 실감했던 것 중의 하나는 위로받고자 하는 욕구가 강한 사람일수록 분노도 잘 한다는 것이다. 대안학교를 처음 접하는 학부모들 중에는 대안교육에 대해 과도한 기대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리고 그 기대 중에는 아이 교육의 문제 해결이 아니라 부모 자신의 문제 해결을 바라는 경우도 있다. 하지만 교사는 아이 교육의 문제만도 벅찬 상황인지라 부모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떻게 대처할 방법도 능력도 없다. 부모는 자신의 기대, 즉 위로받고 싶은 갈증을 채워주지 못하는 학교에 분노한다. (아이는 학교에 만족하는데도 부모가 학교를 떠나는 경우가 있는 건 이 때문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기대가 주관적이고 과했다는 사실도, 또 분노의 명분으로 내세우는 학교에 대한 비판이 사실이 아닌 뒷담화나 선입견에 근거하고 있다는 사실도 헤아리지 못할 만큼 이성을 잃고 있을 때가 많다. 그래서 몇 번의 경험 끝에 나는 그들이 분노하거나 학교를 비난하는 건 학교(교사)가 잘못해서가 아니라 그냥 그들이 화가 많이 쌓여 있는 사람들이어서 그렇다는 걸 알았다. 학교(교사)는 그냥 그들에게 분노를 표출할 만만한 대상으로 걸려들었을 뿐이다. 조합식의 학부모 주도 학교가 아니라 교사 주도인 우리 학교 같은 경우에 학교나 교사를 비난하면 다른 학부모들의 공감대를 쉽게 얻어낼 수 있다. 이 때문에 그들에게는 교사가 만만한 대상으로 여겨지는 것이다.
하여튼 화가 쌓인 사람이 작은 꼬투리라도 있으면 대상에 관계없이 화를 폭발시키는 경우는 우리 사회에서 이외에도 허다히 많이 찾아볼 수 있다. 화로 인한 사건, 사고는 최근에 자주 생기고 있는 층간 소음으로 인한 주민간의 다툼과 폭력(심한 경우에는 살인에까지 이른다), 묻지마 폭력과 살인, 방화 등 우발적인 형사 사건의 다수를 차지할 뿐 아니라, 일상 생활에서의 여러 다툼들에서도 주요 변수로 작용할 때가 많다.
그만큼 화의 문제는 개인적인 문제이면서 동시에 사회적인 문제로 비화된다. 근대 이전의 전통 사회들에서 이런저런 교육을 통해 아이 때 올바른 품성을 지니도록 애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반면에 현대 사회는 지나치게 실용성과 성과에 집착한 나머지 올바른 품성 도야라는 것이 교육의 주된 목표가 아닌 건 물론이고, 한국 사회에서는 교육의 목표 중 하나에 들지 않을 때도 자주 있다.
화가 일어나는 건 억울하다는 주관적 판단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화는 종종 사이비 ‘정의’라는 갑옷을 입는다. 그들은 분노의 분출을 ‘정의의 실현’인 듯이 위장하고, 스스로에게도 그렇게 합리화한다. 하지만 형제가 싸웠을 때 부모가 어떤 이유에서든 한쪽 아이만 나무라면 나무람을 당한 그 아이가 느끼는 감정이 억울함이다. 자신이 얼마나 잘못했든지 간에 앞의 문맥과는 전혀 상관없이 부모의 나무람 탓에 자신이 피해를 입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말하자면 억울함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감정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다시피 억울하다고 느낄 때 분노가 일어난다.
우리 아들이 2, 3개월 된 아기 때의 일이었을 것이다. 무슨 이유에선가 젖 먹이는 게 늦어졌다. 서둘러 아기를 안고서 젖꼭지를 아기 입가에 갖다 대었는데, 그 전 같으면 허겁지겁 젖을 빨았을 아기가 오히려 몸을 뻗대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화를 내면서 울었다. 아기가 화를 낸다는 게 이상한 말이긴 하지만 아기는 그렇게 기를 쓰고(화를 내면서) 한동안 울고 난 후에야 젖을 빨기 시작했다. 영문을 몰라 당황하던 나는 뒤늦게 젖을 먹는 아기를 쓰다듬으면서, “젖을 늦게 줘서 화 많이 났구나. 엄마가 미안해”라고 말했다. 이 기운이 전해졌는지, 젖을 먹으면서도 뭔가 억울한 감정을 여전히 수습 못하는 것 같던 아기의 호흡과 팔다리의 긴장이 봄눈 녹듯 편안해지는 것이 느껴졌다.
이처럼 사람은 누구나 -설사 아기라도- 주관적 기준, 혹은 기대가 있는데, 그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이 발생하면 억울해하고 분노한다. 아이가 어릴수록 최대한 예외를 두지 말고 생활을 규칙적으로 하는 게 아이의 정서에 좋다고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예를 들어 아이의 취침 시간을 부모가 너무 탄력적으로 적용하면, 아이는 밤 늦게까지 놀 수도 있구나라는 주관적 기대를 갖게 되고, 다음날 취침 시간을 엄격하게 적용하려는 부모에게 억울해하고 화를 내게 된다. 전후 문맥을 생각할 수 있는 어른이자 당사자가 아닌 부모 입장에서는 ‘어제는 늦게까지 놀도록 봐줬으니 오늘은 제 시간에 자는 게 당연한 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아이 입장에서는 오늘의 강제가 어제의 느슨함으로 보상되지 않는다. 오히려 어제의 느슨함이 있었기에 아이는 오늘 밤 억울하고 화가 난다.
-- to be continued--
2013. 3. 12.
'금안당 > 대안 시선'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기사 링크 - 고등학교 과학 교과서의 진화 관련 오류들 (0) | 2013.03.21 |
---|---|
화를 풀어야 사회가 건강해진다 2 (0) | 2013.03.15 |
내가 왜 대안학교 교장을 하겠다고 나섰던 거지? 2 (0) | 2013.03.02 |
드라마 동이를 보면서 가졌던 이런저런 잡념들 (0) | 2013.02.27 |
내가 왜 대안학교 교장을 하겠다고 나섰던 거지? 1 (2) | 2013.02.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