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국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 멀고느린구름 



내가 최전방 GOP를 수호하는 사단의 장교로 있을 때의 일이다. 내 주요 업무 중 하나는 최전방에 있는 전적지로 안보관광을 오는 VIP들의 관광가이드를 맡는 일이었다. 하루는 6.25 참전 용사들 20여명이 방문했다. 사단장은 극진한 예우를 갖추어 안내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6.25전쟁 당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던 GOP 상에서 1년 동안 근무를 했었던 나는 오래 전부터 참전 어르신들을 만나뵙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옷매무새를 다른 때보다 좀 더 단정하게 하고 참전 용사들이 타고 있는 관광버스에 올랐다. 버스 창 밖으로 보이는 주요 지형과 유적지들을 빠짐 없이 하나하나 설명을 했다. 주요 전투가 벌어진 전적지에 와서는 당시의 전선 상황과 연합군의 전략, 어르신들이 지켜낸 땅의 중요성 등등을 설명하며, 진심으로 존경하고 감사하다는 말씀을 올렸다. 그러자 80은 훌쩍 넘어 보이는 한 할아버님께서 눈시울을 붉히며 내 두 손을 꼭 쥐어주시는 것이었다. 


"고맙네. 정말, 잊지 않고 이렇게 젊은이들이 우리를 기억해줘서 고맙네."


나도 가슴에서 울컥 눈물이 치솟으려는 것을 간신히 참았다. 모진 세월의 풍파에 시달리며 거칠어진 할아버님의 손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그날 '참전 용사'라는 이름을 지니고 50여년 전 자신들이 싸운 전투지로 돌아온 어르신들은 다들 가장 낮은 병사 계급으로 전쟁에 참가한 분들이었다. 이 분들은 당시의 전선 상황에 대해 아직도 모르고 계셨고, 내 설명을 듣고서야 당시 당신들이 전쟁의 어느 시점에서 싸웠고, 그 싸움의 의미가 어떠했는가를 되새길 수 있었던 것이다. 50년이 지나서야 말이다. 그리고 다들 삶에 지쳐 있었고, 목숨을 바쳐 나라를 구한 그 대가를 제대로 누리지 못하고 계셨다. 80대 참전 용사들이 입고 있는 옷은 마치 기나긴 세월을 그대로 견딘 것처럼 남루해보였다. 그 분들은 6.25 전쟁 후 다시 탄광으로, 공장으로, 고기잡이 배 위로, 월남으로, 아파트 경비원으로, 하청 노동자로... 몸으로 한국 현대사를 견디어 온 분들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수많은 독립운동가들에게 그러했던 것처럼, 이분들을 대우해주지 않았다. 군사정권 시절에도 출세한 것은 정권의 입맛에 맞았던 일부 지휘관급 군인뿐이었다. 김종오 장군은 6. 25 전쟁 당시 6사단장으로서 유일하게 북한군의 남침을 3일 동안 방어하고, 최초로 압록강변까지 진출했다. 그리고 전쟁 말기에는 9사단장으로서 백마고지를 사수하여 지금의 철원을 우리의 땅으로 지켜냈다. 너무도 뚜렷한 영웅의 면모를 남긴 그는 그러나 늘 백선엽이라는 이름 뒤에 숨겨져 오고 있다. 


김종오 장군. 그와 6사단 장병들이 없었다면 사실상 오늘의 대한민국도 없었을 수 있다.

김종오는 장도영, 박정희와 함께 5. 16. 군사 쿠데타에 가담했으나 최종적으로는 박정희가 대통령이 되어서는 안 되며, 혁명의 과실을 민간에게 돌려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장도영의 생각도 같았다. 박정희는 장도영을 숙청했고, 김종오는 지병으로 사망했다. 김종오의 마지막 회심(回心)이 그를 영원히 백선엽의 그림자로 만든 게 아닐까 ? 지나친 오해일까.


'어버이 연합'이라는 단체가 있다는 것을 이제는 많은 분들이 알고 있을 것이다. 극우 쪽 사람들을 제외하고 일반 시민이 갖는 이 단체의 이미지는 '가스통 할배'라는 단어로 대변된다. 못 말리는 노인들이라는 게 대체적인 평가다. (* 참고 기사 - 어버이연합에 대한 심층 보도)


그러나 나는 이 분들을 단순히 그렇게 여겨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이 분들과 이 글의 첫 머리에서 소개한 '참전 용사' 어르신들은 어쩌면 같은 분들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이 분들이 우리들에게 듣고 싶은 말은 단순한 것이다. 


"고맙습니다.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있어서 우리가 있을 수 있습니다. 잊지 않겠습니다."


나라에 바친 것에 비해 이 분들이 나라로부터 받은 것은 너무도 보잘 것 없는 것이었다. 나라를 위해 평생을 싸워 온 사람들이 나라에 저항하는 일은 불가능한 일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자기 존재를 부정하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분들은 나라에 요구하는 대신, 자신들에게 고맙다는 말조차 해주지 않는 사람들에게 분노한다. 자신들이 틀렸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울분을 터뜨린다. 


나는 단호하게 말하고 싶다. 이 분들은 틀리지 않았다. 잘못하지 않았다. 잘못이 있다면 나라의 것이지, 개인의 것이 아니다. 


역사의 평가가 다를 수 있겠지만, 나는 그 과오를 최선을 다해 한국의 현대사를 돌파해온 개인에게 물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어찌 되었건 지금의 토대를 만든 것은 우리 앞 세대의 힘이다. 개인에게는 한 없이 고마워하고, 역사의 책임은 국가와 위정자들에게 단호히 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가장 저열하다고 생각하는 인물은 사람의 순수한 마음을 이용해서 자기의 목적을 이루려고 하는 치들이다. 그저 "고맙다, 틀리지 않았다"는 말을 듣고 싶은 순수한 어르신들을 선동하여 거리에 나서게 하고, 악의적으로 다음 세대와 이간질을 하려고 하는 이들이 분명히 있다. 어르신들을 두 번 욕되게 하는 일이다. 


어버이연합의 사무총장은 어버이가 아니라는 아이러니.


이렇게 뒤에서 앞 세대의 순결한 애국정신을 이용하려 하는 이들은 고작 역사 교과서의 몇 줄을 바꾸는 것으로  앞 세대의 넋을 달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일본의 수탈을 정당화하고, 독재의 당위성을 강조하는 것이 어째서 앞 세대의 넋을 달래는 일인지는 알 수 없다. 대한민국의 건국 시점을 1919년에서 30년 늦추어 잡는 것이 어째서 역사를 바로 잡는 일인지도 이해할 수 없다. 그렇다면 일제강점기 시절에는 나라가 없었다는 말인가. 우리가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계승하지 못했고, 오히려 북한보다 늦게(북한은 1946년 2월, 사실상 정부에 준하는 체제를 확립) 나라를 세웠다고 말하고 싶은 것인가.


나는 역사 교과서가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기억해야 할 애국자들을 좀 더 많이 역사책 속에 기록해야 한다. 현재 대부분의 역사 기술은 위정자와 역사적 위인들에 포커스가 맞춰져 있다. 일제강점기 40여년 동안 나라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운 수 많은 독립운동가들, 6. 25 전쟁 당시 최전선에서 나라를 지켜낸 병사들, 산업화 시대에 산업 현장에서 피땀으로 지금의 대한민국을 이룩한 노동자들. 이 바닥의 역사를 복원하고 기록하는 것이야 말로 진정한 애국 교과서가 아닐까. 그런데 정작 이런 노력을 기울이고 있는 것은 애국세력의 학자들이 아니라, 그들이 종북세력이라고 강조하는 진보 진영의 학자들이다. 누가 진실을 가리고 있을까.


단언컨데, '애국심'을 강조하는 나라는 애국자를 위한 나라가 아니다. 진정 애국자를 위한 나라는 그런 말을 내세우지 않고 '상식적으로' 애국자를 예우하는 나라다. 무명의 독립운동가들을 재조명하고, 6.25 전쟁 당시 전사한 무명 병사들의 유해를 발굴하여 국립묘지에 이장하는 작업을 시작한 것이 국민-참여 정부였다는 것은 조용한 웅변이다.(*관련 기사) 상식은 시끄럽지 않은 것이다.




2015년 현재, 애국자를 위한 나라는 없다. 순결한 애국심을 이용한 소란만이 있을 뿐이다. 애국심이란 것이 어떻게 나라에 대한 복종심에 지나지 않는 것이겠는가. 나라의 뜻에 저항했던 이순신과 율곡 이이, 동학 지도자들, 개화파들은 모두 매국노였다는 말인가. 애국심은 복종심이 아니다. 충성심이다. 충(忠)이란, 온 마음을 다하여 그 대상을 바른 길로 이끄는 일이다. 나라가 바른 길에 있지 않다고 여길 때, 길을 고쳐 걸을 것을 간하는 것이 곧 애국이다. 나라의 존립이 흔들릴 때는 무겁게 종(從)하는 것이 애국의 방편이 될 수 있겠으나, 나라가 건재할 때는 더 나은 길을 함께 모색하기 위해 수시로 반(反)하는 것이 오히려 애국이다. 적어도 우리가 사는 대한민국이 각 시민의 비판적 의견을 존중하고 수렴하여 나아가는 자유민주주의 국가라면 말이다. 


2015. 10. 16. 



날짜

2015. 10. 16. 11: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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