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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가 아이들을 지켜줄까요?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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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CTV가 아이들을 지켜줄까요? 3





CCTV가 아이들을 지켜줄까요? 3(완)

- 멀고느린구름



느긋하게 글을 이어오는 동안 사회에는 그 사이 또 여러가지 이슈들이 생겨나 어린이집 씨씨티비 건은 이제 또 옛날의 일이 되어버리고 있는 것 같다. 


서양 근대의학에서는 열이 나거나 몸에 통증이 생겨나는 등의 '고통'을 사라지게 하는 것을 치료라고 보아왔다. 반면 서양의 기타 전통의학이나 대체의학, 동양 의학 등에서는 열이나 몸에 생겨나는 통증이 오히려 몸의 자연스런 치유과정이라고 보았다. 그래서 오히려 열을 더 많이 나게 해서 치유과정을 단축 시키는 치료법도 행해져 온 것이다. 단기적인 고통의 경감보다는 동일한 원인에 의해서 고통이 또 생겨나는 것 자체를 막는 것이 치료라고 보는 이 관점을 나는 옹호하는 편이다. 고통을 경감 시키는 것이 곧 치료라고 한다면 해열제나 진통제야 말로 만병 통치약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씨씨티비는 우리 사회에 만연한 각종 범죄에 대한 일종의 진통제 같은 것이라고 보여진다. 어린이집 씨씨티비 설치 건과 관련된 인터넷 댓글들을 살펴보다가 다음과 같은 글을 보게 되었다. 


"우리도 바보가 아니다. 씨씨티비가 근본적인 해결책이 되지 않는다는 것쯤은 알고 있다. 하지만 당장 불안한 마음이 있고, 이 불안한 마음을 달래줄 수 있는 최소한의 대책조차 빨리 진행되지 않는다는 것에 울분이 생기는 거다. 가방 끈 긴 인간들이 잘난 척하며 근본적인 대책 운운하는 것은 듣고 싶지 않다."


일부분 공감이 가는 의견이다. 당장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면 일단 진통제로 두통을 진정시키고 그 다음 해결책을 찾고 싶어지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만성 두통을 달고 살고 있는 나는 진통제가 얼마나 감사한 존재인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한편, 진통제는 굉장히 위험한 약이다. 진통제로 고통을 가라앉힌 다음, 그 뒤의 근본적인 대책을 강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병원에 입원해서 의사에게 전적으로 치유의 과정을 내맡기고 있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고통이 끝나면 그걸로 이후의 일 같은 건 별로 생각하지 않게 되지 않던가. 손님이 온다고 급히 방 정리를 할 때, 지저분한 것들을 대충 소파 밑이나 장롱 속 같은 곳에 밀어넣었다가 손님이 간 후에 차분히 다시 정리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씨씨티비의 진통 효과는 근본적인 대책으로 나아가는 걸음 그 자체를 더디게 할 수 있다. 초기에 병증을 알았을 때 천천히 근본 문제를 살펴가면 완치를 할 수 있듯이, 어린이집의 어린이 학대 현상이 광범위한 현상이 아닐 때 오히려 진통제를 쓰기 보다 차분히 문제의 근원을 들여다 보는 것이 가장 좋은 예방책이 되리라 본다. 


내가 교육자로서 고민해본 근본적인 대책은 다음의 것이다. 교육자를 교육하는 방식이 바뀌어야 한다. 사건이 일어나고 난 뒤 언론에서는 보육교사를 선별하는 제도를 주로 문제 삼았다. 그런데 나는 보육교사를 교육 공무원처럼 가려 뽑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별로 해결되지 않을리라고 본다. 당장, 초중고 공립학교의 교사는 모두 국가가 가려 뽑고 있지만 그 제도가 '인격적'으로 훌륭한 교사를 걸러내주는지 생각해보자.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전혀 그렇지 않다.'라는 항목에 동그라미를 쳐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교사의 '인격'을 검증할 수 있는 시험을 새롭게 만들어야 할까? 아마도 연기력 테스트가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이것도 안 되고 저것도 안 되면 어쩌자는 말인가. 교사를 기르는 교육이 바뀌는 수밖에 없다. 


나 역시 대학교에서 교사가 되기 위한 필수 교육학 수업들을 90%이상 수학해본 사람인데, 이 커리큘럼이라는 게 대체로 형편 없는 지경이다. '교육'이라고 하는 행위가 지니는 중대한 의미를 몸에 새겨가는 과정이기는 커녕 오히려 그 반대로 교사 훈련이 이루어진다. 인간을 훈육한다는 것에 대한 심도 깊은 철학전 논의는 쉽게 진도를 채우는 식으로 넘어가고, 사람의 마음이나 학습의 과정을 기계적으로 파악하는 서양의 낡은 교육심리학은 철저하게 암기를 한다. 인격적인 엄격함보다는 매혹적인 교수법이나 머리 속에 입력하고 있는 정보의 양 등이 더 훌륭한 교사의 자질로 인정된다. 


이런 교육에 의해 양성된 수많은 대한민국의 교사들에게 군자와 같은 스승상을 요구하는 것은 사실 팥빙수 집에 가서 국밥을 주문하는 일이다. 


그리고 좀 더 깊게 성찰해보자면 이런 교사 교육과정을 만들어낸 것은 결국 우리들이다. 다수의 부모들이 인격적으로 훌륭한 교사보다는 아이들의 학업 성취도를 효율적으로 높여줄 교사를 원하기 때문에, 교육대학들은 그 수요에 맞춰 공급을 행하고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사회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들을 결국 온 우주를 돌고 돌아 내 마음 속으로 돌아온다. 이렇게까지 말하면 너무 아득한 일이 되어버릴 테니, 이 단락의 주제는 각자 자기 자신의 교육관을 반성해보는 것으로 일단 마무리를 짓자. 


보통의 시민들은 각자의 욕망이 이끄는 대로 어느 정도 판단을 하더라도, 대학교에 있는 교수들까지 교육을 수요와 공급이라는 구도로 파악해서 가야할 방향을 잃어서야 되겠는가. 엄중한 성찰이 필요한 시점이고, 미래를 위한 큰 방향 전환이 있어야 할 것이다. 


제안할 만한 하나의 아이디어로 교육학 커리큘럼에 '동서양 교육사'를 넣고 비중 있게 다루는 방법이 있겠다. - 사실은 더 나아가 『논어』나도덕경 등을 필수로 읽게 하는 것이 어떨까 싶지만 - 다행히 우리 동양에는 '공자'라고 하는 큰 스승의 이정표가 있다. 그 맥을 이어서 인격적으로 훌륭했던 스승들은 우리 역사에도 차고 넘친다. 그들의 삶을 살펴보며 귀감으로 삼게 하는 것은 새내기 교사들에게 좋은 자극제가 될 것이다.  


기왕에 나온 대책들 중에서도 고려해볼 것이 많이 있다. 특히 보육교사에 대한 처우가 개선되어야 한다는 점, 그리고 한 교사가 맡아야 하는 아동의 수를 10명 이하로 줄여야 한다는 점 등은 우선적으로 살펴야 한다. 


누군가를 설득하기가 어려운 세상이다. 3회에 걸쳐 어린이집 아동 학대 사건으로 촉발된 문제를 다루어 봤지만 이 글을 읽고 생각을 바꾸게 될 독자가 있을지는 잘 모르겠다. 나는 내 주장을 펼칠 때 늘 마음의 한 쪽에는 빈 터를 두려고 노력하는 편이다. 자기 마음이 꽉 차 있으면 다른 사람의 좋은 의견도 수용하지 못하게 된다. 그러면 결국 오판을 하고 좋지 못한 결과를 얻게 되는 것은 자기 자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요즘에는 어떤 주장을 하면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다들 극단적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다. 그러니까 저 사람이 저렇게 말하는 건 내 의견은 엉터리라고 말하는 것과 같아 라고 해석해버리는 것이다. 사실, 나 또한 점점 그런 사람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경계하게 된다. 말을 걸 때는 들을 공간도 남겨둬야 한다. 스스로 자신을 되돌아보며 조심스레 말을 걸어본다. 


2015. 3. 28. 



날짜

2015. 3. 28. 0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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