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롭고 민주적인 의사결정 구조를 가진 대안학교의 학생들은 일상 속에서 토론과 자치 회의 등을 통해 자연스럽게 민주주의를 배워간다.
교권이냐, 인권이냐
-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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⑶ 결국, 교육민주화가 답이다 1 | 2 |
(3) 결국, 교육민주화가 답이다 2
최근 몇 해 교육감 선거 과정을 통해 이슈가 되었던 '학생인권조례'나 '9시 등교'등을 반대했던 분들의 논리를 따라가보면 그 핵심에는 '그렇게 해서 어떻게 아이들을 통제하느냐'는 문제의식이 있다. 언론상에서는 마치 이 논쟁이 정치적 이념 논쟁인 것처럼 보수와 진보를 나누어 이슈화하고 있지만, 이 문제는 엄연한 교육 문제이다. 그리고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교육 철학의 문제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교육을 '통제 행위'로 볼 것인가, '중재(仲裁) 행위'로 볼 것인가. 국가주의적 사회에서 국가는 국민을 '통제'하는 역할을 하고, 국민은 국가의 아래에서 피지배층으로서 지배를 받고, 국가에 헌신하고 충성해야할 의무를 지니게 된다. 국가는 국가에 충성하지 않는 국민에 대해 공권력을 이용하여 통제할 정당성을 지닌다. 반면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는 국민을 '통제'할 수 없다. - 여기서 통제할 수 없다는 말은 그러한 능력이나 권한을 지니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국가의 역할이 '통제'에 있지 않다는 의미이다. - 자유민주주의 사회의 국가가 존립하는 목적은 시민 개개인의 자유가 충돌할 때 나서서 분쟁을 중재하는 역할을 하기 위해서이다. 국가라고 해서 아무렇게나 개인의 분쟁에 개입하여 특정 시민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정해진 법 질서에 의해서만 - 법 또한 국민에 의해 선출된 대의기관인 국회가 만든다. - 국가의 공적인 통제력을 행사할 수 있다.
만약 대한민국의 교육이란 것이, 유소년과 청소년 층을 예측할 수 없는 위험성을 지닌 생물체로 규정하고 이를 일정한 수용시설에 모아서 통제하려는 행위라고 이 사회가 전반적으로 합의한다면 '학생인권조례'니 '9시 등교'니 하는 식으로 위험한 생물체의 자율성을 확대시키는 정책들은 매우 위험천만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우리나라의 교육이 그러한 국가주의 사회의 수용소에서 행해지는 행위를 넘어서, 건전한 자유민주시민을 양성해내고, 건강한 상식과 정의에 입각한 양심을 지닌 사람을 만들어내는 일이라고 한다면, 교육자의 입에서 학생들을 통제한다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참으로 의아한 일일 것이다. 왜냐하면 애초에 교육은 통제 행위가 아니고, 교육자 역시 통제자로서 권한을 부여 받은 게 아니기 때문이다. 민주사회의 교사가 중재자가 될 수 있을 지언정, 통제자가 되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결국, 교육민주화가 답이다 1'에서 밝힌 것처럼 민주적 의사결정 시스템이 확립된다면 그에 발맞추어 근본적인 인식의 변화가 함께 따라가야 한다. - 인식의 변화가 먼저 있고, 뒤따라 시스템이 바뀌는 것이 바른 순서이겠지만 우리 교육이 그런 식으로 변화해가기에는 지나치게 오랜 시간이 걸릴 것이다. 그 사이에도 학생들의 고통이 계속된다는 것을 생각하면 우선 시스템이 변하고, 그 시스템에 발맞추어 기존의 교육주체들의 의식을 점차 변화시켜가는 방법도 차선책으로 좋다고 판단한다. -
교사(교감, 교장 등을 포함하는)가 통제자에서 중재자로 전환하기 위해서는 우선 스스로 먼저 통제자의 권력을 내려놓을 필요가 있다. 그리고 내려놓은 권력은 당연히 학교 사회의 시민에 해당하는 학생들에게 돌아가야 한다. 교육의 민주화라는 것은 결국 국가주의 사회가 자유민주주의 사회로 이행될 때, 권력이 한 명의 국가지도자로부터 다수의 국민에게로 분화되는 것처럼 교장, 교감, 주요 교사가 거머쥐고 있는 학교의 권력이 학생들에게로 나누어질 때 완성되는 것이다.
물론, 학생들에게 권력이 나누어진다고 해도 학생들의 마음대로 학교가 좌지우지 되어서는 안 된다. 학생들의 권한도 응당 학교의 교육철학과 교육목표, 학교의 자체 규정에 입각하여 행사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실, 이런 이야기는 민주주의 시스템의 가장 기본적인 것이라 굳이 언급하는 것도 우습다. 그러나 학생들에게 조금이라도 권한을 나눠주면 마치 학교 사회가 붕괴될 것처럼 말하는 어른들이 하도 많으니 구태여 하는 말이다. 그런 분들께는 대한민국은 권력이 국민 개개인에게 나누어져 있지만 - 이 부분에서 동의하지 못한 분들이 있을 것도 같지만, 대체로... 라는 관점에서 이해를 해주시길 부탁드린다.- 비판할 것 비판하고, 반대할 것은 반대하면서도 나라는 잘 유지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이렇게까지 이야기해도 끝끝내 "그러면 당신이 공교육 교실 현장에 와서 교사를 해보슈!" 라고 소리치실 분도 있을 것이다. 당연히 나 역시 학생 수가 30~40명 정도 되는 교실에서 온갖 혼란스런 에너지가 발산되는 속에서 평정을 유지하며 정해진 교육을 100% 진행해 나갈 자신은 없다. 나 혼자서라면 말이다. 그러나 모든 교사가 함께 힘과 지혜를 모은다면 얘기가 달라질 것이다. 최근 한 교육 관련 팟캐스트를 들으며 감명 깊은 일화를 전해 들은 것이 있다.
학교 폭력이 큰 문제가 되던 한 고교가 있었다. 여러가지 벌칙도 주고, 체벌도 해보고 했지만 소용 없어서 난감해하던 중, 한 선생님이 한 가지 아이디어를 제안했다. 그리고 교사들이 함께 힘을 모아 그 아이디어를 되든 안 되든 끝까지 시행해보았다. 그러자 불과 몇 달만에 놀라운 효과가 나타났고, 학교 폭력이 거의 사라졌다고 한다. 그 아이디어란, 매일 아침 교문에서 선생님들이 등교하는 아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이었다고 한다.
왜 우리 선생님들은, 부모님들은 통제가 아니면 방법이 없다고 생각하게 되었을까. 답은 간단하다. 대체로 통제하는 식의 교육법만을 눈으로 보고 몸으로 느끼며 전수 받아왔기 때문이다. 사실은 통제자가 아닌 중재자로서 아이들 앞에 서는 경험을 많이 해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중재하는 스킬보다 통제하는 스킬이 훨씬 더 숙련되었고, 몸에 잘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들 잘 아시지 않을까, 어린시절 한 마디 뻥긋하지도 못하고 일괄적으로 통제당했을 때의 공포와 상처를.
다른 방법은 많이 있다. 아직 우리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을 뿐. 만약 다른 방법이 없다고 한다면 통제하지 않고도 아이들을 잘 기르고 있는 다른 나라들은 그저 태생부터 우리와 다른 인류이기 때문일까. 그렇지 않다. 우리도 이제 그렇게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줄 때가 되었다. 통제자로서의 막강한 권한을 내려놓을 때 잠시 쓸쓸하고 위축된 기분을 느낄 수도 있다. 그러나 권한을 나누어 가지고 중재자로서 아이들 속으로 들어갈 때 훨씬 더 따뜻하고 편안한 기분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비단 교사뿐 아니라 부모로서도 마찬가지다.
結
자, 우리가 이렇게 기존에 가지고 있던 통제자로서의 권력을 내려놓는 것만으로 우리의 역할이 끝난 것은 아니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50%의 일은 훌륭히 완수한 것이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다음으로 아이들이 자신들이 나눠가진 권한을 바르게 쓸 수 있도록 지도하는 일이 필요하다. 권력을 내려놓는 일도 처음이겠지만 아이들이 권력을 가지게 되는 일도 처음일 수 있다. 그러므로 튼튼한 제도와 교사, 학생이 모두 함께 동의할 수 있는 공정한 학교의 규정이 필요하다. 그리고 각 교육 주체들은 공동으로 정한 그 규정을 엄격하게 지키고, 지키지 않을 시에는 불이익을 감수하겠다는 다짐을 해야한다. 기본적으로 민주주의 사회에서의 사회규칙이라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정한 규칙이기 때문에 지키는 것이다. 직접적인 참여를 하지 않았어도 자신이 선출한 - 반대표를 던졌다고 해도 사회의 다수의 의해 선출된 - 대통령이, 입법기관이, 지방자치단체장이 시행하는 정책이고, 규정이기 때문에 따르는 것이다. 대통령이나 국회가 나를 위협하고, 따르지 않으면 엄청난 불이익을 주기 때문에 어떤 규정에 순응하게 되는 것은 이미 정상적인 자유민주주의가 작동하지 않고 있다는 적신호이다.
그러나 우리 학교는 수 십년을 이렇게 빨간 신호등을 켜고 지내온 것이 아니겠는가. 대안학교 학생들을 제외하고는 - 또는 최근의 혁신학교 학생들 - '내가 만든 규칙이기 때문에 내가 지킨다.' 라고 하는 이 자유민주주의의 상식적인 체험을 해본 학생이 거의 없을 것이다. 이런 방식의 교육이 계속된다면 애써 어렵게 구축한 우리나라의 민주주의 제도가 미래세대로 갈 수록 유명무실하게 바뀌는 것은 시간문제가 아닐까. 이제는 다시 고장난 부분을 수리하고 정상적인 민주주의 사회의 교육기간으로 리디자인할 때다.
'교권이냐, 인권이냐' 라고 하는 주제로 4회에 걸쳐 글을 쓰며 도달한 결론은 결국 '교권'과 '인권' 어느 쪽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 아니었다. '교육민주화'를 통해서 공교육을 바로 세우면 '교권'과 '인권'은 결코 대립되는 항이 아니라 양쪽 모두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상보적 가치였다. 그러나 반대로 교육민주화가 유보되면 유보될 수록 교권과 학생인권은 마치 양립할 수 없는 가치처럼 계속 반목하게 될 것이다. 모쪼록 지엽적인 문제를 떠나, 정치적인 수사들을 떠나서, 그 본질을 살필 수 있기를. 언제나 교육에 문제가 생길 때 그 문제로 인한 가장 직접적인 피해를 입고 있는 것이 우리 아이들이라는 사실을 잊지 않기를. 그리고 교육은 통제의 수단도 아니고, 국가발전의 수단도 아니며, 한 아이가 어른이 되어 행복한 삶을 일구어 갈 수 있도록 앞 세대가 뒷 세대에게 보내는 사랑의 수단임을 기억하기를 바란다.
2014. 9. 30. 멀고느린구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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