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괜찮아 사랑이야’, 괜찮아 모두 부모 탓은 아니야 

- 멀고느린구름 



최근 방영되어 화제를 끌었던 드라마 <괜찮아 사랑이야>를 즐겨 보았다. 이야기 자체의 완성도와 캐릭터에 몰입하는 연기자들의 연기 모두 훌륭한 것이기도 했지만, 나에게는 좀 더 특별한 재미(?)가 있는 드라마였다. 어쩐지 나 자신의 이야기 같았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극중의 인기 작가이자 가정폭력의 트라우마를 지닌 장재열에게 적극적인 감정이입을 했다. 


비록 세세한 사항의 차이는 있지만 나 역시 가정폭력이 심했던 가정에서 자라났고, 장재열처럼 대단한 작가는 아니지만 글을 쓰는 것을 통해 나 자신을 지탱해왔다. 장재열이 ‘강우’라는 소년의 환시를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는 동시에 자신을 가학해왔다면, 나는 아주 어릴 적부터 품에 안고 있었던 인형에게 애착을 느끼고, 그 인형과 가상의 커뮤니케이션을 하며 상처를 치유해왔다. 그래서 내게 인형이라는 사물 - 시중의 모든 인형이 아니라, 나와 함께 시간을 보냈던 인형들만 해당 - 은 천을 이어붙여 만든 가상의 형상이라는 물질로서의 의미를 넘어선 존재이다. 하지만 장재열처럼 인형이 실제로 생물체와 같은 방식으로 살아 있다고 착각하고 있지는 않으니 다행한 일인지도 모르겠다. 


괜찮아 사랑이야에는 크게 두 개의 상처와 그 상처를 로맨스와 연대라는 형태로 치유해가는 두 사람이 등장한다. 어릴 적 어머니의 외도 모습을 목격한 정신과 의사 지해수와 어릴적 의붓 아버지로부터 학대를 당하고, 어머니의 방화살인 모습을 목격한 인기작가 장재열이다. 공교롭게도 두 사람의 상처는 모두 부모로부터 생겨난 것으로 그려진다. 


부모가 아이를 잘 교육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모가 제대로 아이를 보호하지 못했기 때문에 등등. 


우리가 흔히 아이들이 자라난 뒤에 잘못된 행동을 보일 경우 떠올리게 되는 말들이다. 아무튼 아이의 잘못에 대해서는 대개 부모에게 상당한 책임이 지워지기 마련이다. 


최근에 있었던 지방선거를 전후로 해서 정치인과 그 자녀 사이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서울 시장 후보로 나선 정치인의 아들이 세월호 유가족을 부적절하게 비난하여 아버지가 대신 사과하는가 하면, 경기도지사로 당선된 정치인의 아들이 군 부대에서 물의를 일으켜 그 아버지가 대신 사과를 하기도 했다. 두 케이스의 공통점은 성인이 된 자녀의 행위에 대해 그 부모가 앞서서 사과를 했다는 점이다. 


대체로 사람들은 정치인인 부모가 사과를 하는 것이 도의에 맞다고 생각하는 것 같았지만 나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아니, 그보다 사과 이전에 성인이 된 자식이 저지른 일에 대해서 그 부모가 연대 책임을 지는 것이 모든 경우에 옳은가? 하는 점에 대해서도 사회적인 논쟁의 장이 마련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한다. 그 부모가 직접 사주하거나 부추겨서 일어난 사건사고가 아닌 경우에야 한 사람의 성인이 스스로 판단해서 저지른 일에 대해서는 그 본인이 응당 책임을 져야 하고, 직접적인 사건의 관련자가 아닌 한에서야 대신 나서서 사과를 할 필요가 있을까. 


다시 드라마 이야기로 돌아와보자. <괜찮아 사랑이야>의 작가 노희경은 두 주인공의 정신질환의 계기가 부모의 행태임을 적시하면서도 동시에 부모에 대해 온정적인 태도를 보인다. 부모가 파렴치한 사람들이라거나, 용서 받지 못할 죄를 지은 사람들이라고 여기도록 만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내가 대안학교 교사를 하면서 많이 목격한 부모의 모습은 조금 달랐다. 우리 사회의 대다수 부모들은 아이의 삶을 마치 자신의 삶과 동일시하고 있고, 자신이 어떤 행위를 하면 자식을 통해 그 결과가 나타난다고 믿고 있었다. 행위는 부모가 하고 결과는 자식에게 나타나는 이 기묘한 일심동체의 세계를 유교적 풍습에서만 찾는 것은 단편적인 인식일 것이다. 물론 유가에서 사람을 교육하는 일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고 있으나, 자식과 부모 간을 혼연일체의 동일체로 볼 정도는 아니다.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그것이 비록 부모자식관계일지라도 유별이 있으며, 지켜야 할 선이 있다는 것이 오히려 유가의 인간관이다. 


대한민국의 부모가 유독 유아, 아동, 청소년기, 심지어 성인기의 자녀에게까지 일심동체로서의 인식을 지니게 된 것은 전쟁의 폐허 속에서 나라를 일으켜 세우며 자신이 누리지 못한 삶을 후손에게 누리게 하고, 그것을 통해 대리만족을 느끼던 전후세대의 모습을 이어받은 탓이 크지 않을까 싶다. 그러다보니 이미 풍족한 삶을 누리게 된 지금에서도 자녀가 자신보다 더 누리기를 바라며, 객체로서의 자기 삶까지 유보해가며 자식 교육에 열을 올리고 있는 것이 아닐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자녀와 부모는 결코 일심동체가 아니고, 일심동체가 되어서도 안 된다. 오히려 청소년기 정도에 이른 자녀라면 되도록 빨리 자립심을 길러 스스로를 부모로부터 독립적인 객체로 인식하게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어떤 아이가 정신질환에 걸렸다고 해도 그 아이가 정신질환에 걸리게 된 원인은 부모가 될 수는 없다. 이렇게 말할 수는 있겠다 그 원인 속에 부모가 포함된다거나, 부모가 계기가 되었다고. 그러나 아버지가 가정폭력을 행사하는 모든 가정의 아이들이 장재열과 같은 정신질환을 겪게 되지는 않는다. 만약 그런 식이라면 대한민국 성인 중 온전한 사람을 찾기 힘들 것이다. 


대체로 아이의 세계를 어른들은 아주 단순하게 본다. 유아기나 아동기에는 부모가 좀 더 아이의 세계에서 많은 비중을 차지할 수도 있다. 50 ~ 60% 정도. 그러나 아이가 커갈 수록 아이는 자신의 세계를 만들어가기 마련이고, 그 속에서 부모는 20 ~ 30%정도의 영향력을 지닐 수도 있고, 어떤 경우에는 미안하지만 5% 미만이 될 수도 있다. 그러니 부모가 너무 아이에게 감정이입을 해서 자신이 아이의 세계를 지배하고 있는 중추라는 의식은 빨리 접는 것이 부모에게도 좋다. 


왜일까? 만약 장재열이나 지해수가 30대가 된 이후에도 부모에게 청소년기와 같이 의존적인 감정을 품고 있다면 그들은 절대로 그 부모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부모는 여전히 자신이 가장 의존하고 있는 세계를 파괴하고 오염시키는 장본인으로 여겨질 테니까 말이다.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두 주인공이 부모의 고충을 이해하고 그들을 용서하거나 배려할 수 있게 된 것은 자신들이 이제는 부모의 세계에서 온전히 독립했다고 인식했기 때문이다. 그들 각자가 자신의 다른 세계를 만들었고, 그리고 서로 어울리는 두 사람이 예전에 고통스러웠던 부모의 세계보다 훨씬 더 희망적인 세계를 만들어 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맛보았기 때문이다. 두 주인공은 부모로부터 독립하여 다른 친구와 동료들의 세계에서 위로와 지지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덕분에 자신들의 유년 시절과 부모의 입장에 대한 객관적인 거리를 확보할 수 있었던 것이다. 


드라마에서 두 주인공은 결코 부모에 의지해서 자신들의 상처를 극복하지 않는다. 오히려 부모들은 별로 변하지 않는다. 다만 성인이 된 두 사람이 새로 만난 인간관계 속의 연대와 각자의 의지를 통해 자신을 변화시킴으로써 상처를 극복해낸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은 근대 문학이나 예술에 있어서 여러가지 상상력을 제공해주는 수훈을 세우기는 했으나, 아이 양육에 관한 모든 원죄를 부모에게 돌리는 부작용도 낳고 말았다. 하지만 최근의 뇌과학의 성과를 살펴보면 아이의 정신상태가 전적으로 부모에 의존해 결정되는 것이 아니며, 한 번 고정된 것이 영원히 불변하는 것도 아님을 알 수 있다. 뇌의 네트워크 구조 - 어떤 특정한 사항에 대해 특정하게 반응하는 회로랄까 - 는 각 객체의 개별적인 노력에 의해 성인이 된 후에도 얼마든지 변화할 수 있는 것이다. 외려 ‘트라우마’라는 개념 그 자체가 ‘트라우마’를 만들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트라우마라는 용어자체가 사실 아무 데에나 쉽게 쓰일 수 있는 용어가 아니다.) 


<괜찮아 사랑이야>에서 장재열이 자신이 상처를 극복하며 뱉은 대사가 인상적이다.


“그래도 내가 이렇게 좋은 어른으로 자라서 나 자신에게 정말 고마워.”


나 역시 오랜 시간 이 말을 나 자신에게 해주고 싶었다. 아직도 내 마음 속에는 어린 날의 끔찍한 풍경들이 선하다. 부모님이 서로 폭력을 쓰는 장면, 욕을 하거나 소리를 지르는 장면, 내가 당했다고 생각하는 멸시와 배척 등등. 그러나 그런 것들은 이제 아무래도 좋다. 지나간 일일 뿐이다. 과거의 내가 어렸듯이 그때의 부모도 부모로서 온전한 역할을 하기에는 어렸다. 겨우 지금의 나 정도의 나이였을 뿐이니까. 


지금 내가 이런 글을 편안한 마음으로 쓸 수 있게 된 것은 글쓰기를 통해 일찍 내 세계를 구축하고, 부모와 나의 세계를 공유하는 삶에서 독립해 나올 수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많은 경우, 부모들은 자식이 일탈하거나, 심신의 질환을 앓거나 하면 더욱 자식의 세계에 밀접하게 접근하여 모든 것을 부모의 의지대로 통제하려는 경향이 강해진다. 부모가 밀접하게 다가오면 다가올 수록, 자식은 되려 모든 책임을 부모에게 돌리고 의존하게 된다. 


허나 서로를 걱정하고 필요한 도움을 주되 서로가 별개의 개인이라는 것을 위기의 순간에 더욱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충분히 자립할 수 있는 나이의 아이가 방황하고 있다면 부모가 노력해야할 것은 그 아이를 자기 품으로 감싸 안고 들어가 감추어버리는 일이 아니라, 그 아이가 건강히 자기 자신으로 자랄 수 있을 고유의 세계를 만들 수 있게끔 한 발 뒤에서 지원해주는 일이다. 이는 비단 부모뿐 아니라 일선의 교사들에게도 유효한 말일 것이다. 가끔씩 비상한 교육적 사명감을 지닌 교사들 중에서도 아이의 세계에 지나치게 깊게 개입하여 아이를 의존적으로 만들어버리는 일이 발생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모쪼록 부모로서 자식을 사랑하려 한다면 아이가 좀 더 자유로울 수 있도록, 그리고 자신의 세계를 가지고 자립할 수 있도록, 그럼으로써 자연스러운 방향으로 자신을 성장시킬 수 있도록 사랑해야 하지 않을까.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우선 아이의 모든 문제, 아이라는 결과가 모두 부모에게서 비롯된다는 과도한 부채감을 내려놓아야 할 것이다. 아이가 일으킨, 아이에게 일어나는 모든 일이 모두 부모의 탓은 아니다. 아이를 기르는 것은 이 세상 전체라는 말도 있지 않은가. 


부모님이나 가정의 상황 때문에 고통스러워 하는 친구들도 반대로 부모가 이 세상의 모든 것이라는 생각에서 모쪼록 벗어나기를 바란다. 고개를 조금 돌리면 더 따스한 세상, 좋은 어른들이 곁에서 여러분을 기다리고 있을 수 있다. 여러분을 좀 더 자유롭고, 독립적으로, 자연스럽게 만들어주는 사람이라면 믿을만한 사람일 것이다. 그 사람이 좋아하는 연예인이든, 사랑하는 연인이든, 존경하는 선생님이든, 동경하는 위인이든 상관 없다. 괜찮다, 아마도 정말 그건 사랑일 테니까. 


* 뱀발 : 제 부모님의 명예를 위해 첨언하자면 두 분은 각자 과거의 과오에서 벗어나 지금은 무척 건강한 삶을 살고 계십니다^^; 



날짜

2014. 9. 17. 1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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