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의 한 장면



교권이냐, 인권이냐 

- 멀고느린구름 


 LIST 

 ⑴ 교권이란 무엇인가?

 ⑵ 교권침해 증가, 문제는 어디에?

 ⑶ 결국, 교육민주화가 답이다. 



(2) 교권 침해 증가, 문제는 어디에?


얼마전 로빈 윌리암스의 타계 소식을 전해 듣고 마음이 무척 무거워졌었다. 특히 그의 사망원인은 우리가 사는 세상의 고단함을 다시 한 번 되돌아보게 해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랑했던 배우 로빈 윌리암스의 대표작은 역시 <죽은 시인의 사회>일 것이다. 경직된 교실의 문화를 전복시키며 책상 위에 우뚝 섰던 영화 속의 로빈 윌리암스는 우리들의 가슴 속에 영원한 참교사의 상으로 남아 있다. 


집중기획 '(2) 교권침해 증가, 문제는 어디에?'를 준비하면서 여러 교권 침해 사례들을 살펴보고 직접 현장의 교사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며 우리 시대의 교사가 <죽은 시인의 사회>의 로빈 윌리암스로부터 참 멀리 떠나와버린 것은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어 착찹함을 금할 수 없었다. 우리 사회는 더이상 '키팅 선생님'을 원하지 않고 있었다. 


'교권침해'라고 하는 문제는 단순히 언론에 선정적으로 보도되는 것처럼 일부 교사들이 학생에게 뺨을 맞고, 학교로 쳐들어온 부모들에게 폭행을 당하는 '형사사건'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보다 더 깊은 불신이 학교 사회에 뿌리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학생이 교사를 신뢰하지 않게 되었고, 그런 학생을 교사들도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학생과 교사 사이에는 스승과 제자라는 온정적 관계가 점차 해체되고, 소비자와 공급자 -혹은 직장인-이라는 냉정한 관계가 어느새 굳건히 자리잡아 가고 있었던 것이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이하 한국교총)은 보도자료를 통해 교권침해가 해마다 꾸준히 증가하고 있음을 밝히고 있다. 최근 2013년의 또 다른 자료에 의하면 학생-학부모 부당행위로 인한 교권침해가 연간 300건에 다다른다고 하는 것도 보인다. 몇몇 자료는 1000단위까지도 올라가기도 하는데 이는 학생 및 학부모에 의한 교권침해 뿐 아니라, 교사간, 혹은 교장과 교감에 의한, 또는 자치단체 등 여러가지 종합적인 교권 침해 사례를 모은 자료였다. 대체로 전체 교권침해 사례 중 30% 정도가 소위 언론에서 선정적으로 보도하고 있는 학생-학부모의 폭력 등에 의한 교권침해 사례였다. 


한국교총은 위의 교권침해 증가 사례를 해마다 조사하여 '교권 강화'를 내세우는 동단체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삼고 있었다. 또한 2009~2010년 사이에 제정된 '학생인권조례'와의 상관관계를 지속적으로 주장하고 있기도 하며, 상당수의 교원이나 대중들은 이에 공감하고 있기도 한 형편이다. 그러나 정말 그러한가? 에 대해 신뢰할 수 있는 연구결과는 아직까지 찾아볼 수 없는 것 또한 사실이다. 한국교총이나 일부 보수단체 등에서는 '학생인권조례' 지정 이후 폭발적으로 교권침해 사례가 증가했다고 말하고 있지만 위의 해당 단체가 조사한 통계자료를 보아도 인권조레 제정과 관련 없이도 해마다 교권 침해 사례가 꾸준히 증가해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이것은 우리 사회의 어떤 흐름이 지속적으로 교권을 추락하게 만드는 흐름으로 진행되고 있었다고 보는 것이 더욱 합당하지 않을까. '학생인권조례'가 그 흐름을 좀 더 촉발시켰다고 한다면 그 부분은 어느 정도 일리가 있을 것 같다. 


한국교총에서 밝히고 있는 학생에 의한 주요 교권침해 사례는 아래 그림과 같다. 



이렇게 요약하여 언론에 특별히 보도자료를 제공할 정도라면 한국교총에서는 위 사례들을 주목할만한 교권침해 사례로 판단한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 같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조금 고개를 갸우뚱하게 된다. 중고등학생 정도 연령의 반항기 있는 아이라면 언제 어느 시대에서라도 할 수 있을 정도의 발언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다. 다만, 예전에는 교사들이 체벌을 가한다고 해도 그에 대응할 수단이 전혀 없었던 아이들에게 한 가지 수단이 생겼다는 것만이 다르다. 


이렇게 되면 한국교총에서 내세우고 있는 '교권'이라는 것의 실체가 매우 이상한 모양이 되고 만다. 즉, 아이들이 지니고 있는 유일한 한 가지 방패를 뺏는 것이, 아이들을 무방비 상태로 만들어야 바로 설 수 있는 것이 교권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것일까. 넓게 보아서 '학생지도를 올바르게 할 수 있는 권한'이 교권의 한 축에 포함되어 있다고 가정해보자. 과연 학생들의 저 발언이 날 지도하지 말라는 발언인 것인가. 글쎄, 내 판단에서는 학생들의 저 발언은 아주 최소한의 의미를 담고 있는 것 같다. 곧, 날 '폭력으로 지도하지는 말라는 것'이 아닐까. 


가정에서 매를 맞고 자라는 아이가 부모에게 "저를 때리지 말아주세요." 라고 하는 게 "더이상 저를 양육하지 말아주세요." 라는 말이 되는 것은 아니지 않는가. 아이들은 어른들에게 방법의 전환을 요구하는 것이지 교육의 권한을 박탈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아이들의 방법 전환의 요구를 교육할 권리의 박탈로 받아들이는 어른들이란 어떤 어른들일까. 냉정하게 보자면 결국 전환할 다른 교육의 방법을 가지지 못한 어른들일 것이다. 다른 방법이 없는데, 방법을 바꾸라고 하니까 그만두라고 하는 것과 같은 말로 들리는 것이다. 안타까운 일이다. 


사실, 진정한 교권 침해는 다른 곳에서 일어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나 역시 대학교에서 교육자로서의 여러 전공과목을 이수한 사람이지만, 솔직히 말해 대학에서 배운 것을 일선 학교에서 소신 있게 실현할 수 있는가. 안정적인 직업이라서 교사를 선택하는 사람들의 비중이 높아지고 있다는 비판도 있지만, 대다수의 교사들은 분명 모두가 <죽은 시인의 사회>에서의 키팅 선생님처럼 아이들의 눈높이에 서서 참교육을 실천하는 교사를 꿈꾸며 교정에 첫 발을 내딛었을 것이다. 하지만 교정에 들어서는 순간 전혀 다른 교육 환경과 시대가 요구하는 교육 목표, 거기에 온갖 행정 잡무, 부모들과의 마찰에, 상급자들과의 관계까지 더해지면 참교사가 되는 길은 요원해지기만 한다. 


'교권'이라는 것은 (1)화에서 다루었듯이 단지 '교사의 권력이나 권위'를 나타내는 말이 아니다. 광의의 '교권'은 교사의 소신에 따른 교육을 할 수 있는 권리다. 키팅 선생님과 같이 아이들의 눈높이에서 아이들 각자의 꿈과 자유로운 영혼을 신장시키기 위한 교육을 하겠다고 교사가 마음을 먹었다면, 그 교육적 소신에 대해서 그 누구도 불합리한 개입을 할 수 없도록 보장해주는 것이 진정한 교권 보호이다. 그러나 당연히 개인 교사의 교육적 소신이 인권 존중과 대립되는 것이라고 한다면 교사의 소신에 대한 제지가 있어야 할 것이다. 


결국, 문제는 '인권'이다. 한국교총이 교권 확립이라고 주장하는 요소는 엄밀하게 파고들어 이야기하자면 교사의 인권 보장이다. 누구나 인간으로서 존엄할 권리가 있고 존중받을 권리가 있기 때문에, 그 대상이 학생이든 교사이든, 부모이든, 함부로 폭언을 일삼거나, 폭행할 수 없는 것이다. 교육현장이 학생들의 인권을 보장해주는 조치를 '이제서야' 시행하고 나섰기 때문에 정작 아이들은 자신들이 보장받고 있는 인권이 권리인 동시에 의무라는 것을 망각하고 있는 것 같다. 자신들의 인권이 보장 받고 있다면 당연히 반대로 교사들의 인권을 보장해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것이 민주주의 사회의 기본 합의가 아닐까. 허나 아이들은 그 합의를 아직 모르고 있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것을 가르쳐줘야 하는 것 역시 교사와 어른들의 몫이다. 


한국교총과 보수성향 단체들의 요구대로 학생인권조례에 상응하는 교사인권조례는 분명 제정될 필요가 있으며, 교과부는 지난 2013년에 [교권보호 종합대책]을 발표하여 교사의 인권에 대한 보호를 제도적으로 보장하고 나섰다. (* 관련 기사) 이는 무척 환영할만한 일이다. 그러나 앞서 밝힌 진정한 교권 보호에 대한 제도적 장치는 미흡해보인다. 학교장의 방침이나, 교육부의 방침에 대해 일선 교사가 자신의 교육적 소신에 따라 거부의사를 표명할 수 있는 등의 교권 보장책은 보이지 않는 것이다. 


교과부의 상기 종합대책에 따라 지금까지 제기되어 왔던 교사 인권 침해에 대한 문제들은 어느 정도 보완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여전히 교사 인권의 문제와 학생 인권의 문제를 상호대립적인 것으로 보고 인권조례의 약화나 폐지를 주장하는 이들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지 않고 있다. 



폭력은 순환한다.



이렇게 생각해보면 어떨까. 폭력은 폭력을 낳는다. 지금까지 아이들의 작은 폭력을 교사들이 더 큰 폭력으로 눌러 왔기 때문에 교사 인권 침해 사례가 적었다고 주장한다면, 그것은 사실 조폭 세계의 알고리즘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폭력은 좋지 않다.' 라고 하는 대전제조차 교육계가 합의를 이룰 수 없다면 우리가 어찌 선진국이라고 어디가서 명함을 내밀 수 있겠는가. '폭력은 좋은 해결 수단이 아니다.' 라는 최소한의 대전제에 합의를 한다면 누군가는 폭력의 알고리즘을 멈춰야 한다. 누군가 멈춰야 한다면 응당 더 큰 힘을 가진 사람이 먼저 내려놓아야 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는 이제 내려놓았다. 아마 얼마간은 더 그 폭력에 짓눌려왔던 작은 폭력들이 들불처럼 일어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을 다시 더 큰 폭력으로 짓누르려고 한다면 우리는 영원한 악순환 속에 빠져들고 말 것이다. 우리는 이제 폭력을 대화와 배려, 이해와 용서, 제도와 합리성으로 바꾸어나가야 한다. 어른들이 다른 방법이 없다고 손을 놓는 순간, 아이들도 어른들의 손을, 교사의 손을 놓을 것이다. 어른들이 먼저 손을 내밀어줘야 한다. 그게 어른으로서의 몫이 아닌가. 



참 교사상에 대한 이야기를 다룬 만화 속의 한 장면



제도권 내에 방법이 없다면 이미 10여년간을 아무런 체벌 없이도 학생들을 건강하게 길러온 대안학교들의 사례나, 해외 선진국들의 사례를 적극적으로 배워오고 우리 교육에 접목하면 될 일이다. 더군다나 우리나라의 많은 대안학교들의 경우 제도권 내에서 문제아로 낙인 찍힌 채, 갈 곳 없이 떠돌다가 입학한 학생들을 의젓하고 건강한 아이로 성장시킨 경험과 데이터가 무궁무진하다. 대부분 일체의 체벌 없이 이루어낸 일이다. 아니, 오히려 제도권보다 10년 앞서서 학생인권을 존중해온 결과일 것이다. 


지금까지 많은 매체에서 교권 침해 증가의 주 원인으로 '학생인권조례'를 들어왔다. 하지만 깊게 들여다본 결과 침해되었다는 교권의 문제도 결국 교사 '인권'의 문제였다. 한 쪽의 인권을 높인다고 다른 쪽의 인권이 낮아지는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난다 해도 한시적인 문제이다. 결국 인권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우리 모두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진정으로 아이들을 높인다면 아이들도 교사들을 높여줄 것이다. 아이들이 감동하고 눈물을 흘릴 정도로 아이를 높여본 적이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아이가 교사나 어른을 높이지 않는다면 그건 분명 마음의 병이 있는 상태일 것이다. 그러나 그 또한 우리 어른들이 결국 보듬어야 할 아이가 아니겠는가. 


학생인권과 더불어 교사인권에 대한 보장 역시 명백하게 이루어져야 한다. 2013년 제정된 교권보호 종합대책이 교육현장에서 부디 긍정적인 효과를 이루어내길 소망한다. 더불어 제도 외에 교사와 학생, 학부모 이 세 교육 주체가 공통으로 노력해야할 부분이 있다. 이는 다음 화에서 좀 더 세밀하게 다뤄보도록 하겠다. 


* 다음 편에 계속됩니다. - (3) 결국, 민주주의가 답이다. 



2014. 8. 24. 



날짜

2014. 8. 25. 0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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