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과 제자, 그리고 부모 그 오래된 미래
- 멀고느린구름
대안학교 교사로 일하다보니 종종 공교육 현장에서 심적인 상처를 입고 학교를 찾은 아이들을 만나게 되었다. 하늘 군(가명)도 그 중 한 명이었다. 하늘 군은 주의력이 부족하고 종종 과잉행동을 보이는 아이였다. 아무렇지도 않게 사람에게 욕설을 하거나 큰 소리를 치고, 수업 시간에도 예상 외의 돌발행동을 보여 무척 곤욕스러웠다. 이전에도 비슷한 행동을 보이던 아이들의 담임을 맡아 본 경험이 있던 나는 부모님과 만나 아이의 가정에서의 상황을 경청한 뒤 정확한 진단을 받아볼 것을 요청드리고, 학교에서 아이를 지도할 방향을 설명드리며 협조를 부탁드렸었다. 아이마다 각기 다른 해법이 필요하겠지만, 하늘 군의 경우 명확한 사회적 룰이 내면에 자리잡지 못한 것이 문제라고 보았다. 나는 보통이라면 대안학교에서는 절대 하지 않을 방법으로 - 거의 군대식으로- 아이에게 사회적으로 지켜야 할 룰을 정기적으로 주입시켰다. 그리고 틈틈이 학교에서 시행하고 있는 아이에 대한 규율들을 부모님께 말씀드렸다. 그렇게 해서 두 학기 정도를 보내자 아이는 이전보다 훨씬 적은 강도의 규율 혹은 주의만으로도 스스로의 행동을 중단하거나 조절할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나와 하늘 군은 일종의 미운 정이 들어 돈독한 친구 관계가 될 수 있었다. 이는 교사의 교육 행위를 신뢰하고 기다려준 부모와 그 부모의 신뢰에 보답하고자 하는 교사의 사명감이 만나 일으킨 좋은 시너지 효과였다.
1980년대와 1990년대에 걸쳐 학창 생활을 한 나와 그보다 20여년 전인 아버지 세대의 학창시절 모습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적어도 아버지의 학창시절 이야기를 들어보면 말이다. 놀이문화에서의 차이는 조금 있으나 교실의 분위기와 선생님들의 성향, 무엇보다 선생님과 학생, 또 선생님과 부모님의 관계에 있어서는 차이점보다 유사한 점이 더 많다. 나는 이른바 국민학교를 마지막으로 다닌 세대인데다가, 반공 교육과 교련 수업도 마지막으로 받은 낀 세대라서 더욱 그런 것 같다.
사실, 오래전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면 좋았던 기억보다는 차라리 잊고 싶은 일들이 더 많았다. 선생님들은 대부분 근엄한 표정을 지으며 으름장을 놓기 일쑤였고, 손찌검은 물론 각종 연장을 이용한 아동학대 수준의 폭력도 만연했던 때이다. 이제는 그런 짓을 벌였다가는 곧바로 휴대폰에 찍혀 SNS에 올라올 테니 아무도 그런 행위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그것이 교사들의 자발적인 반성에 의한 교실문화 혁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보화 기기의 발달로 인한 집단 감시체제와 교사와 부모 간의 모종의 권력관계가 역전된 영향이 크게 작용한 탓이라는 점은 아쉽다.
공교육에 종사하고 있는 지인들의 말을 들어보면 학교에서 교사는 을 중의 을로 전락하여 학생에게도 부모에게도 도무지 소신에 입각한 발언을 할 수가 없다고 한다. 교육적 행위를 굳이 두 가지로 분류한다면 지식을 전수하는 행위와 먼저 삶을 산 사람(문자 그대로 선생-先生)으로서의 조력 행위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전자의 행위에 대해서는 공교육이 시스템적으로도 크게 발전한 측면이 분명 있으나 후자의 측면에서는 거의 그 기능을 상실해가고 있는 상황인 것으로 보인다. 교실에서 불특정 다수의 아이들을 상대로 잘못된 조언을 한 번 했다가 부모-교장-교감-학생주임-담당교사로 이어지는 ‘내리사랑’을 경험하고 눈물을 훔치는 경우가 빈번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이르고 만 것은 근원적으로 교사와 학생(혹은 부모)의 관계가 전통적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서 판매자와 소비자의 관계로 급격히 전환되고 있기 때문이다. - 혹은 이미 전환이 완료되었기 때문이다. - 스승과 제자의 관계에는 ‘사랑’과 ‘사명감’, ’존경’과 ‘믿음’ 등이 주요한 키워드가 된다. 허나 판매자와 소비자의 관계에서 중요한 것은 ‘서비스의 질’뿐이다. ‘서비스의 질’이 지불한 댓가에 비해 부족하다고 여겨지면 소비자는 당연히 클레임을 걸 수 있는 것이다. 이 관계에서는 인간간의 유대감은 효력을 잃고, 냉혹한 경제원리가 앞서게 된다. 부모가 교사를 스승이 아닌 판매자로 대할 때는 자연히 아이도 교사를 스승이 아닌 판매자로 바라보게 된다. 아이의 눈에 교사는 자신의 인생을 위한 조력자가 아니라 그저 안정된 직업에 종사하는 서비스업자로 비춰진다. 이런 관계에서는 당연히 전통적인 교육 행위가 이뤄질리 만무하다.
허나, 우리의 기대수명이 더욱 연장되어 100세가 넘어간다고 하는 이 시대에 교육이 한 날개를 잃고 ‘지식의 전수 행위’로만 수렴된다면 학생 개인뿐만 아니라 국가적으로도 큰 낭패를 보게 될 것이다.
조선 시대만 해도 선비들에게 공부는 ‘평생’에 걸쳐 하는 것이었다. 물론, 후기 사회에 들면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열중하고 벼슬을 얻으면 더 이상 배움을 중단해버리는 일이 흔해지기는 했다. 허나 그래도 자고로 선비라면 평생에 걸쳐 학문을 연마해야 한다는 분위기는 살아 있었다. 그러던 것이 해방 이후 공부가 급격히 ‘개천에서 용나는’ 수단으로 변모하면서 본래의 의미를 많이 상실했다. 그래도 개발시대에는 그것이 효용이 있었다. 개천에서 용날 정도로만 공부해서 일단 자리를 잡으면 그 자리에서 계속 지위를 누리며 살 수 있었던 것이다. 수도권 대학에 들어가면 좋은 일자리가 보장되었던 때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 시기는 20세기 말엽에 잠깐 일어났던 특수한 상황에 불과할지도 모르겠다.
적어도 지금 많은 미래학자가 예측하는 21세기는 끊임없이 스스로를 개발하고 공부해나가지 않으면 도태되고 마는 시대이다. 더 이상 청소년 시절 바짝 채워놓은 지식만으로 남은 평생을 살아갈 수 없는 사회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전의 특수한 시대를 살았던 어른들은 자신의 모습처럼 아이들에게 ‘개천에서 용나기를’ 기대하며 무조건적인 지식 습득 위주의 교육을 밀어부치고 있다. 그러나 우리가 어떤 시대에 살고 있는지 냉철하게 바라보아야 한다. 아이들이 학창시절 내내 머릿 속에 우겨넣은 지식들은 스마트폰을 들고 검색어를 한 번 입력하면 바로 알 수 있는 지식들일 것이다. 이미 지식은 집단지성에 의해 웹이라고 하는 거대한 네트워크 컴퓨터 속에 갖춰져 있다.
오히려 지금의 시대는 지식을 전수하는 교육행위보다 삶을 먼저 살아간 사람으로서의 조언이 더 유니크한 교육 행위이며, 좀 더 아이들에게 보충되어야 할 것은 후자의 교육이라고 판단한다. 무엇을 아는가보다 이미 있는 지식을 ‘어떠한 방향’으로 이끌고 나갈 것인가, 결합시킬 것인가 하는 통찰력과 용단이 필요한 때이다. 통찰력과 용단은 그저 많은 지식을 머릿 속에 넣고 있다고 해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통찰력과 용단은 삶의 태도와 세상을 보는 폭넓은 안목으로부터 솟아난다. 아이들이 취해야 할 것은 올곧게 자신의 삶을 끌고 나갈 수 있는 삶의 태도와 소신 있는 교사들에 의한 다양한 관점일 것이다.
어릴 적 권위적인 교사들에게 종종 들었던 말이 있다. “옛날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았다는데….” 옛날에 제자들이 스승의 그림자를 밟지 않았던 것은 그 스승이 권위적이고 무서운 사람이었기 때문이 아니다. 스승이 제자보다 먼저 앞서 삶의 바른 본(本)을 보였고, 그 모습에 제자들이 감동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제자들은 그 감동을 집에 가서 부모에게 전했고, 부모는 다시 한 번 스승에게 고마움을 느껴 자연스럽게 신뢰관계가 형성되지 않았겠는가.
옛날과 교사의 권위가 회복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권위는 부차적으로 얻어지는 것이다. 회복되어야 할 것은 교사와 학생, 그리고 부모 사이의 관계다. 이 관계가 회복되어야만 교사들이 다시 사명감을 가지고 선생으로서의 교육 행위를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부모가 교사를 신뢰하면 양식이 있는 교사는 그 마음에 보답할 수밖에 없다. 교사가 그 마음에 화답하여 아이에게 진심을 다할 때 아이도 더 바른 자신의 방향을 찾아갈 수 있다. 그런 아이의 모습을 보면 부모는 더욱 교사에 대한 믿음을 돈독히 할 것이다. 이 선순환의 관계성을 회복해야 한다. 누가 먼저 시작해야할 것이 아니다. 모두가 함께 모두가 먼저 시작해야할 일이다.
2014. 3. 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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