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고느린구름 |  




미래의 교육이 곧 SF적 기술 교육은 아니다



대안교육 정체현상의 내적 요인, 세대교체 불발 


미래의 교육을 생각해보게 되었다. 대안교육 20년을 주로 외적인 측면(철학이나, 교육내용 등 내적인 가치가 아니라)에서 살펴 보았던 지난 글과 최근 혁신학교의 바람(?)이 조금 주춤하는 듯한 모습, 그리고 여러 사회현상의 징후들을 살펴보며 앞으로 어떤 교육이 필요할까, 또는 세상이 어떤 교육을 요청하고 있을까 새삼 고민에 휩싸였다. - 솔직히 말하자면 올해 독립해서 재창간하긴 이전까지 이 개구리웹진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던 대안학교의 내부적 위기 상황에 또한 고민의 큰 계기를 제공했다 - 


전술한 것처럼 대안학교는 거의 그 존재 증명이 점점 어려워지는 상황이고, 혁신학교는 한 회가 돌고나서 기존에 혁신학교 모델을 실천했던 교사진이 정해진 인사이동을 함에 따라 다시 기초를 쌓아야 하는 악순환의 고리에 빠져든 것 같은 모습이다. (더불어 참신하게 대안교육의 교육 모델들을 이식하기는 했으나 실질적인 공교육 시스템과 충돌이 발생하며 프로그램을 유명무실하게 대폭 축소하거나, 없애는 수순에 들어가는 것 같기도 하다.) 기본적으로 대안학교의 경우는 외적 가치를 소홀히 해서 발생한 문제적 상황이고, 혁신학교는 내적 가치를 소홀히 해서 발생한 문제적 상황이 아닐까 싶다. 그러나 분명 그 뿌리에는 보다 핵심이 되는 근원적 문제상황이 있다. 바로 1세대의 대안교육철학이 2세대(또는 동세대의 후순위 리더)에게로 발전적으로 계승되지 못한 문제다. -혁신학교의 경우에는 대안학교의 철학은 가져가지 않고, 프로그램만 이식한 오류. 이 또한 철학이 온전히 계승되지 못한 문제의 일환. - 사실, 이 문제는 비단 대안교육 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나라의 지식사회 일반이 함께 고민해봐야 할 문제인 것 같다. 정치인이 다음 세대 정치인에게, 학자가 다음 세대 학자에게, 운동가가 다음 세대 운동가에게 바톤을 넘겨주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 장시간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독자들의 이해를 돕기 위해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상황이다. 도올 선생은 80년대에 떠오른 스타 철학자다. 하지만 여전히 도올 선생 이상의 대중적 파급력을 지닌 철학자는 나오지 않고 있다. - 강신주 정도를 거론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사회적 영향력이나 사숙하는 제자의 규모를 살펴보면 아직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한다 -. 정치의 영역에서는 여전히 김대중, 노무현, 박정희의 시대가 지속되고 있다. 이 또한 70, 80년대가 낳은 정치인이다. 역시 이 시대에 학습한 진중권, 유시민 등이 여전히 진보논객으로 활동하고 있고, 보수계는 조갑제, 전원책 등이 오래전부터 계속 현역이다. 당연히 이분들은 현역 또는 현재적 상징으로서도 충분히 기능을 해도 좋을 만큼 내공이 튼튼한  분들이다. 허나 '원로'라고 해도 좋을 분들의 왕성한 활동에 비해 신진들의 활동은 거의 눈에 보이지 않는 수준이다. 하다 못해 티브이 예능도 10년이 넘게 유재석이 지배하고 있으며, 음악계도 80년대 90년대의 음악가들을 끝없이 재소비하고 있다. 





이는 결국 우리 사회가 새로움을 잃고 '늙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내가 보기에 이 문제는 모순에 의해 공고해지고 있다. 원로가 되어 쉬어야 할 분들은 마땅한 후계자가 없으니 물러나지 못하겠다는 것이고, 뒤를 잇고 싶은 사람들은 원로가 물러나지 않으니 후계자 자리가 애초에 없다는 것이다. 마치 요즘 연승 행진을 거듭하고 있는 복면가왕의 우리동네음악대장의 모습과 비슷하다. 그만 좀 내려가고 싶어도, 자신을 이기는 도전자가 없는 상황이 거듭되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참 서로가 곤란하다. 대중은 어쨌든 더 매력적으로 보이는 쪽을 원하기 때문에 도전자가 명백한 매력(이를 테면 대중음악계의 서태지와 아이들 혁명과 같은 수준의)을 지니고 있지 않으면 좀처럼 말을 갈아타지 않는 것 같다. 


지난 대선에서는 매력적인 인물 두 사람과 기존의 원로를 상징하는 인물 한 사람이 대결하여, 기존 원로를 상징하는 인물이 대통령이 되었다. 하지만 몇 해 사이에 여러 이슈를 겪으면서 상황이 역전된 듯한 조사 결과들이 발표되고 있다. 지난 대선의 새 인물이었던 문재인과 안철수의 지지율 합계가 이미 박근혜 대통령의 지지율 수치를 넘어서고 있는 상황이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이는 결국 유권자 대중들이 세대 교체를 인정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제는 맡겨도 되겠다는 인식 쪽으로 더 기울게 되었다는 말이다. 무엇이 이 변화를 만들었을까? 나는 이 변화 속에서 교육이 배워야 할 요소가 있다고 본다. 



오늘날은 '뭐가 뭔지 모르겠는 시대'



오늘날 뚜렷하게 나타나는 사회적 징후들을 눈여겨 볼 필요가 있다. 징후들이란 앞으로 뚜렷이 나타날 현상의 작은 예고편이다. 즉, 현재 나타나는 징후들은 우리의 미래 사회를 미리 예견해볼 수 있는 미래에서 온 파편들이다. 나는 크게 세 가지 현상을 주목한다. 


첫째는 장기화되는 청년실업이다. 

둘째는 여성 적대/비하 현상의 심화다. 

셋째는 꿈의 소멸이다. 


이 세 가지 현상은 서로 맞물려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서로를 더욱 문제 상황으로 증폭시켜가고 있다. 본격적인 의제는 아무래도 교육과 관련한 것이니, 이 문제는 아주 간단하게만 언급을 해보겠다. 


청년실업은 벌써 몇 년 째 10%대 안팎을 유지하고 있으며, 대학교 등에서 실질적으로는 실업자이지만 실업자로 잡지 않고 있는 예비취업자, 구직자, 아르바이트 및 단기 계약직 취업자 등을 모두 합하면 사실상 실질 청년 실업률은 30%에 육박하는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앞으로 이 현상이 더욱 심화되면 심화되었지 현실적으로 개선이 될 가능성이 없다는 점이다. 여기에는 인공지능의 발달이라는 과학기술의 문제도 개입되어, 인간이 해야 할 일이 점점 줄어들어 실업률을 더 높일 전망이다. 



가장 최약자인 여성을 적대시하는 현상은 실현할 꿈이 없는, 또는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무도 없는 청년세대의 좌절이 심화시킨 현상이 아닐까



최근 강남역 살인 사건으로 표상되고 있는 여성 적대 현상의 심화도 사실, 노동시장의 악화에 큰 영향을 받은 결과다. 노동시장에서 밀려난 남성들이 자신들의 자리를 억울하게 여성에게 빼앗겼다고 생각하는 피해의식이 점차 심화되면서 여성을 적대적으로 대하고, 혐오하기까지 하는 심리적 현상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 길게 다루어야 할 사안이지만 지면의 한계상 다음으로^^; - 


꿈이 없는 것은 비단 청년세대의 문제만은 아니다. 대한민국이라는 국가 전체의 비전이 상실된 시대다. 그리고 엄밀하게 살펴보면 세계 전체의 비전이 상실된 상황이 아닌가 싶다. 도널드 트럼프 같은 비합리적이고 과격한 차별주의자가 미국의 유력한 대통령 후보로 떠오를 수 있는 시대가 바로 오늘날의 세계다. 한 마디로 말해 뭐가 뭔지 모르겠는 시대가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가 아닌가 싶다. 혼돈의 시대다. 혼돈 속에 길을 잃었을 때는 항상 그 자리에 우뚝 서있는 북극성 같은 것이 사람들의 마음을 끈다. 극단적 보수주의나, 극단적 진보주의가 대중들에게 최근 호소력을 가진 이유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모든 극단적인 것들은 사실 구호만 그럴싸하고 그 내실이 허약한 경우가 많다. 그래서 쉽게 무너져버리기도 한다. 하지만 쉽게 무너지지 않는 튼튼한 무엇이 등장했다고 느낄 때 사람들은 그 빛을 향해 우르르 몰려들게 된다. 



사회적 징후를 기존의 철학에 담다 


문재인과 안철수가 성공한 요인은 거기에 있다고 본다. 문재인은 진보적 철학을 안철수는 상대적으로 보수적 가치관을 내재화한 사람이다. 이 두 사람은 자기 철학을 무조건 고집해 자기 속에 매몰되지 않았기 때문에, 사회적 징후에 눈과 귀를 열고, 그 질문에 자기식으로 답하고자 하는 태도를 취했기에 사람들은 지지를 보낸다. 여기서 중요한 요소는 두 가지다. 


첫째는 '자기식'으로 답해야 한다는 것. 즉, 자기의 중심철학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는 사회적 징후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 즉, 외부적 상황에 대한 인식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두 가지가 합해져서 흔들리지 않는 철학을 통해 세상이 내어놓은 과제들을 해결할 적절한 자기만의 '대안'을 내놓을 때 비로소 대중은 화답한다는 것이다. 


이 점에서 나는 다시 논의의 출발점으로 돌아와 미래의 교육을 생각해보고자 한다. 


교육에는 흐트러지지 않을 교육철학이 있어야 하고, 이 교육철학에 기반해 외부의 문제, 특히 교육이라면 미래의 문제에 답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교육이 진정으로 이 세상에 유의미하게 기여할 수 있지 않을까.




내가 생각하는 미래의 교육철학의 핵심과 그 실현 구상


고등학생 무렵부터  나는 내 나름의 교육철학을 구상하기 시작했던 것 같다. 만약 내가 대안학교 교사가 된다면, 혹 나중에 돈을 많이 벌어서 학교를 만들 게 된다면 어떤 학교를 만들까 같은 방식으로 말이다. 우연의 일치로 그 시절 내가 생각했던 것이 훗날 몸을 담게 되었던 대안학교의 설립 철학과 똑같은 것이었다. 


나는 아이들의 자유가 좀 더 확대되고 보장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고, 그 자유의 바탕 위에서 홀로 독립적인 자아를 구성해 갈 수 있는 교육이 더해져야 하며, 그 모든 행위들은 지구의 자연적 리듬이라는 큰 바탕 위에서 유기적으로 실현되어야 한다고 여겼다. 이, 자유, 자립, 자연이라는 세 가지 항이 바로 내가 몸 담았던 파주자유학교의 교육 철학이었다. 또한 이 세 가지 요소는 내가 개인적으로 청년시절에 열심히 탐구했던 아메리카원주민(인디언)이 내재화하고 있는 철학관의 핵심 요소이기도 했다. 



인디언의 방식으로 다음 세대를 길러내는 일은 내게 중요한 삶의 테마 중 하나였고(그래서 '인디언교육'이라는 칼럼도 연재하고 있습니다^^; 많은 애용을-), 마침 감사하게도 내가 억만장자가 되기 이전에 이미 그런 철학을 바탕으로 학교를 설립한 교육자들이 있었다. 그리고 또 아주 우연하게도 인연이 닿아 당시에는 초등학교로만 존재하던 파주자유학교의 전신 행복한학교의 교장 선생님 나팔꽃을 만나 면접을 보고 일단 보조교사로서 일을 시작하게 되었다. 그 후로 정교사가 되고 군복무 기간을 제하고 나면 3-4년 정도의 아주 짧은 시간 학교에 있었다. 그럼에도 그 짧은 시간은 교육에 대한 내 책상머리로서의 생각을 심화시키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대안교육'이란 것이 별 게 아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미래의 교육이다. 각자가 생각하는 미래의 교육이 저마다 다르기 때문에 수 백 개에 달하는 대안학교가 생기는 것이다. 그리고 혁신학교는 영리하게도 이 수백 개의 대안 중에 자기들이 원하는 요소만 쏙쏙 뽑아가서 교육프로그램을 만들었다. 교육철학이나 프로그램에 저작권 같은 것은 없으니 좀(아니 상당히) 억울해도 별 수 없는 일이다. 거저 가져다가 써도 좋으니 좀 누군가 현장에서 실현 시켜주었으면 하는 내 미래의 교육철학은 아래와 같다.  


1. 자유의 측면


'자유'는 미래 세대에게 무엇보다 중요한 가치다. 왜냐하면 미래 세대는 미래가 없는 세대이기 때문이다. 이 말이 무슨 말이냐면 지금 학교에서 교육을 받는 아이들이 살아갈 미래는 우리가 종래에 살아왔던 20세기적 방식으로는 작동할 수 없는 전혀 다른 시대가 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좀 더 쉽게 설명하자면 지금 공부하고 있는 세대는 '예측할 수 있는 미래'가 없는 세대다. 미래라는 것은 항상 예측할 수 없는 것이기는 하다. 그래도 조선에서 대한제국으로 대한제국에서 대한민국으로 넘어온 이후로 100년은 어느 정도 예측 가능한 범위에서 움직이는 시대였다. 우리(슬쩍 나 자신도 예측할 수 없는 미래 세대로 끼워넣으며^^;) 전 세대에게 미래는 '미국'이었다. 20세기의 한국은 먼저 앞 선 시대를 살고 있는 미국을 따라잡기만 하면 됐다. 하지만 지금 세대는 다르다. 우리 자신이 거의 제일 앞에 와 있고, 오히려 우리와 같은 나라가 되기 위해서 달려오는 후발주자국들도 무섭게 따라오고 있다. 내가 볼 때는 최소한 세계 절반 이상의 나라들이 10년 안 쪽으로 모두 같은 선상에서 서서 서로 눈치만 보게 될 것이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하고 서로에게 물으며 말이다. 이 시점에서 필요한 것이 바로 자유다.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자유로운 상상력'이다. 자유로운 상상력은 당연히 자유로운 삶의 기반 위에서 생겨난다. 대한민국의 공교육은 아주 우연한 경우가 아니면 미래 세대의 리더를 길러내지 못할 것이다. 아마도 다음 세대의 정치사회적 리더들은 대안교육의 세례를 받은 아이들 속에서 탄생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공교육은 이미 정해져 있는 프로세스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는 인재들은 양산할 수 있으나, 백지 위에 그림을 그려내는 인재를 만들어낼 가능성은 매우 적기 때문이다. 


지금의 청년 세대가 왜 창업을 하지 않느냐, 왜 도전을 하지 않느냐고 이제와서 기성세대들이 윽박지르고 있는 것을 보면 참 가관이다. 새로운 일을 만들어내거나, 기존의 가치를 전복시키거나, 도전하기 보다는 안정적인 길을 가라고 교육해온 기성세대가 아닌가? 결국 윗 어른들이 만들어낸 세계의 모습일 뿐이며, 자기 얼굴에 침뱉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대안교육이 태동하고 상당수의 대안철학형 학교들이 자유에 바탕을 둔 교육을 시작한 것이 97년 무렵이니 서서히 사회적 성과가 드러나고, 여기서 길러진 아이들이 두각을 나타낼 것이다. 그리고 아마 다음 바통은 혁신학교의 아이들이 이어받을 것이다. 


왜냐하면 대안학교에서 다음과 같은 현상이 나타나고 있는 것을 목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무한정한 자유를 주었더니 애들이 공부를 안 한다 -> 부모들보다 교사들이 더 아이들의 학업 성적을 걱정하기 시작한다 -> 아이들의 미래에 대해 책임질 자신이 없어 일단 공부를 시킨다 -> 대안학교에서 아이들의 자유도가 점점 떨어진다 -> 점점 초기의 교육적 이상을 축소하고 공교육 부적응 학생들을 위한 소규모 학원화가 진행된다 


많은 대안철학형 학교들이 스스로 초기의 설립철학에 의구심을 갖고 가치를 축소하기 시작하면서 겪는 징후들이 여러 학교에서 보여진다. 지난 번 글에서 '대안학교'라는 개념이 이미 공교육 부적응 학생을 위한 학교로 고착화되었다는 지적을 했는데, 상황이 그렇게 된 데에는 대안학교 자체에도 책임이 있는 것이다. 스스로 학교를 그렇게 변화시키고, 점차 사립학원과의 변별력을 상실해오고 있었던 것이다. 


서머힐 수준의 전면 자유교육을 하는 대안학교는 아직도 출현하지 않고 있다


나는 이제라도 대안학교들(대안철학형)이 좀 더 과감해질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초기의 설립취지를 분명하게 살려서 확실한 자신감을 갖고 미래의 대안을 만드는 교육을 구현했으면 싶다. 아이들의 입시, 취직 이런 것에 자꾸 목을 멜 필요가 있을까. 어차피 안 되는데 말이다. 그 문제는 공교육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는 문제다. 소위 스카이를 나와도 취직을 못하고, 제대로 된 업체를 창업하지 못하고 있다. 젊은 세대들이 미래의 비전을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다. 


그렇다고 한다면 초중고 교육은 좀 더 본원적인 것으로 돌아가 '인간'자체를 만들어내는 교육에 힘쓸 필요가 있다. 어느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인간, 어느 기업에 취직할 수 있는 인간을 만들기 보다는 자기만의 미래를 확고하게 그려낼 수 있는 '인간'을 길러내는 일에 방점을 찍어야 하지 않을까. 최소한 대안학교라고 한다면 말이다. 


그런 차원에서 대안학교는 특히 자유교육을 표방하고 있는 학교라면 보다 더 과감한 '자유'를 부여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방어적 수업선택권이 아니라, 전면적 수업선택권, 중고등 과정의 대학교식 수강신청제 등등을 내부 프로그램으로 도입하자. 그리고 자유라고 해놓고 아이들이 너무 학교 안에서만 뒹굴게 해서는 곤란하고 자꾸 학교 울타리 밖으로 자유롭게 넘어갈 수 있는 기회와 정보를 제공해주어야 한다.


선택의 자유와 공간의 자유, 시간의 자유를 부여하고 교사들은 이를 관리하는 노하우를 키워야 한다. 그런데 자꾸만 이를 관리하기가 어려우니 자유를 제한해버리는 쪽으로 시스템을 바꿔나가게 된다. 그건 우리가 감당할 수 없어 -> 아이들에게도 좋지 않을 거야 라는 식이다.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자꾸만 아이를 백지 위에 놓아야 한다. 그리고 낯선 선택, 새로운 그림을 그릴 수 있도록 경험을 제공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가까이 다가올 미래 시대에 제일 앞에 선 국가의 시민으로서 선택하고, 그림을 그려갈 수 있지 않을까?


 

2. 자립의 측면


자립은 첫 번째 항인 자유를 지키기 위해서 필요하다. 뒤집어 말하면 자유는 자립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사실, 자유와 자립은 서로를 견제하는 가치의 요소다. 자유는 카오스(혼돈)를 지향하고, 자립은 코스모스(질서)를 지향한다. 대안교육이 자유를 통해 무언가를 실현하고자 했다가 지나친 혼돈의 요소로 난관에 부딪치면 자유를 줄일 것이 아니라 자립의 가치로서 자유의 혼돈을 보완하도록 해야하는 것이다. 


자립이라고 할 때는 두 가지 면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실질적 의미의 자립, 둘째는 철학적 의미의 자립이다. 


실질적 의미의 '자립'은 아이가 스스로 이 세상을 살아갈 수 있는 무기를 쥐어준다는 뜻에서의 자립이다. 자, 이 무기에는 여러가지 것이 있을 수 있다. 하나는 대한민국 부모-교사들이 광범위하게 생각하는 '학벌'이라는 무기다. (그러나 이미 이 무기는 상당히 효력을 상실했다. 당장 나부터가 소위 고학력자임에도 벌이가 시원치 않다 ㅎㅎ 혹시라도 다르게 생각할 독자들이 있을까봐 나의 학교 졸업 성적은 상당히 상위층이었음을 밝혀둔다.)  또 하나는 기술(자격증)이다. 20세기를 살아왔던 우리 어른들이 생각할 수 있는 게 아마 이 정도가 아닐까 싶다. 학벌(화이트칼라), 기술(블루칼라)이라는 이 쌍두마차의 생존수단은 21세기를 벌써 15년 지나는 동안 빠르게 그 효력을 상실해 가고 있다. 


이제 새로운 무기를 소개하겠다. 매력. 언변. 필력(문장력). 미디어 활용력. 공감-소통능력. 정보수집력. 적응력(새로운 것을 학습하는 능력), 발표력 등등. 지금 내가 나열한 새로운 무기라는 것은 다 형태가 없는 무형의 능력이다. 즉, 이것은 자격증이나 학벌로 증명할 수가 없는 인간 개인의 내적인 힘이다. 미래 시대를 좌우하는 것은 바로 이런 무형의 내적 힘이라고 본다. 자격증의 가치는 길어야 2년이다. 2년 비정규직으로 일하다가 해고를 당하면 다시 새로운 자격증을 얻어야 하는 상황이 오는 것이다. 운이 좋아 정사원이 되어 경력을 쌓는다고 해도 길어야 10년이다. 인공지능 로봇이 10년의 경력을 순신간에 대처하는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채팅창을 통해 수익을 창출하며 살아가는 청년이 생길 것이라고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한마디로 정의하면 미래는 내 앞에 어떤 일이 갑자기 생길지 알 수 없는 대혼돈의 시대라는 것이고, 이때 가장 필요한 것은 지속적인 내면의 힘과 판단력, 적응력인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앞으로 5-10년을 주기로 계속 새로운 직장을 찾아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리게 될 것이다. 더 이상 무언가 내세울 수 있는 증표 하나를 따 가지고 남은 여생을 편히 살아갈 수 있는 그런 시대가 아닌 것이다. 


그런 미래를 상정했을 때, 두 번째의 철학적 의미로서의 자립이 중요해진다. 


간단히 말하면 철학적 의미로서의 자립은 자기 내면에 든든한 기둥을 세우는 일이다. 아무리 외적인 파도와 폭풍우가 몰아닥친다 해도 굳건히 쓰러지지 않을 기둥말이다. 한 번 면접에 떨어지거나, 회사에서 불시에 해고를 당한다고 해도, 그래도 나는 내가 하고자하는 일과, 내가 꿈꾸는 삶이 있으니까! 라고 하며 다시 일어설 수 있게 만드는 그런 힘. 나는 그것을 '자립심'이라고 본다. 사실, 대안학교가 전문직업학교가 아닌 이상 첫 째 의미의 실질적 기능을 수련시켜 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더욱 주력해야 하는 것은 이 두 번째 의미의 자립이다. 자립심을 배양 시켜주는 것이야 말로 학교가 해줄 수 있는 최상의 선물이자, 자유의 대안일 것이다. 


자립심을 튼튼히 하기 위해서 가장 필요한 것은 삶의 목표와 자아의 발견이다. 중고등 과정은 이를 탐구하기 위한 과정이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설령, 이 과정을 통해 자아나 삶의 목표를 발견하지 못하더라도, 그것을 발견해내는 방법 혹은 노력하는 과정의 가치 정도를 아이가 깨달을 수 있다면 그 교육은 성공한 것이 아니겠는가. 



3. 자연의 측면


자유는 주어져야 할 환경이다. 자립은 자기 자신 속에 세워야 할 틀이다. 자연은 그 속에서 환경과 자기 자신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다시 말하면


자유로운 환경 속에서 -> 자립심을 배양해 -> 자연스럽게 자신과 타인,  그리고 세상을 바라보는 것


이렇게 자유, 자립, 자연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한 인간을 만들어내는 일이 내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미래의 교육이다. 자연스럽게 세상과 타인을 바라본다는 것은, 변화하는 그대로의 과정으로서 세상과 타인을 바라볼 수 있게 된다는 의미다. 


우리는 흔히 한 인간 A를 평가할 때, 과거로부터 평가하는 시점까지의 A를 근거로 A는 이렇다고 단정하고 만다. 그러나 A는 평가 이후에 B가 되거나 C, 또는 Z가 되어버릴 수도 있는 것이다. 이 A가 어른일 경우에는 물론 변화의 폭이 줄어들 수 있다. 하지만 A가 아직 아이라면 변화의 폭은 상당하다. 그러므로 섣불리 A를 판단하기보다 판단을 유보하고 흐름 속에서 A의 변화를 살피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어른일 경우에도 큰 깨달음이나 큰 사건을 겪으며 전혀 다른 내면의 혁명을 일으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어른의 경우에도 완전히 변화의 가능성을 닫아버리는 것은 경계할 필요가 있겠다.)


사건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누군가가 선의로 행한 일이 선한 결과로 이어지지 않고, 선하지 않은 결과로 이어질 수도 있다. 


선한 일을 한다 -> 선한 결과가 나온다. 이것은 논리의 세계다.

선한 일을 한다 -> 선하지 않은 결과가 나온다. 이것은 자연의 세계다. 


자연의 세계에서 최초의 의도보다 중요한 것은 흐름이다. 강물이 아무리 맑은 곳에서 흐르기 시작했다고 해도 바다에 갈 때까지 청정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온갖 도전을 이겨내야 한다. 그 흐름에서 자칫 잘못 오염된 곳에 흘러 들면 초기의 청정함은 유명무실해지고 마는 것이다. 


이해가 쉽도록 교육의 측면에서 내 경험을 이야기하면 다음과  같은 경우다. 


나는 오늘날 여성의 인권이 남성에 비해 충분히 보호받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페미니스트적 사고를 지니고 있다. 

-> 어린 남자애들에게 여성을 존중하도록 하는 교육을 해야겠다 싶어, 그 부분을 다소 강조해서 어린 남자아이들에게 이야기했다. 

-> 하지만 오늘날 어린아이의 세계에서는 오히려 남자아이들이 여자아이들에게 상당히 위축되어 살아가는 경향이 있었다. 

-> 내 교육으로 남자아이들의 여자아이들에 대한 피해의식과 반감이 오히려 증폭되었다.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은 내(교육자 개인)가 자연(실제 현상-아이들의 세계)으로부터 교육적 영감을 얻기 보다는 자신의 논리적 사고나 다른 대상(어른의 세계)로부터 교육적 영감을 얻으려 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로부터 도출해보면 '자연'이라는 교육철학은 곧  자연적 세계(아이들의 세계)와 끊임없이 소통하려는 노력이라고 볼 수 있다. 


바람이 불면 풀이 흔들린다. 그것이 곧 자연이다.



그래서 나는 위와 같은 경험을 한 후 전략을 바꿨다. (그래도 내가 전하고 싶은 이야기는 있기 때문에) 그것을 '교육'하는 대신 즉, 당위로 말하는 대신 주장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가령, 나는 몹시 생태주의적인 가치관을 내재화하고 있으므로 다른 아이들에게 생명의 가치를 소중하게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되, 그렇지 않은 생각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는 태도를 보이려고 노력한 것이다. 그러니까 세상에는 저렇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어 정도의 인식만 남으면 만족하는 정도로 물러섰다. 그리고 그편이 오히려 나 자신의 지나친 교육적 책임을 덜어내는 측면에서도 훨씬 좋은 일이었다. 


또 하나의 경우가 있다. 나는 별로 신의 존재를 믿지 않는 사람이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서양철학 수업을 할 때는 신이 있을 수 있는 것으로 가정하고 수업을 진행했다. 그리고 신이 있다고 믿는 사람들의 가치도 최대한 전달하려고 노력을 했다. 나 스스로도 신을 믿는 사람들을 이해하고자 노력하는 관점에서 수업을 이끌었다. 우리가 어느 편에 서 있든 신을 믿는 사람도 있고, 신을 믿지 않는 사람도 있으며, 이쪽도 저쪽도 아닌 사람도 있는 것이 자연스런 현실인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일단 상호인정하는 바탕을 마련하는 것이 가장 기본적인 철학교육이라고 봤다.


결국, 최종적인 선택은 아이들이 훗날 스스로 해나가는 것이고, 교사는 다양한 판단의 정보를 제공할 뿐이다. 무언가를 인위적으로 몰아가지 않고,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전시해 보여주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판단할 수 있도록 돕는 것. 나는 그것이 교육의 최대한의 역할이라고 보며, 그 선을 넘어서지 않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결 結


대안교육 20년을 맞아(?) 되돌아보는 글을 쓰면서 너무 홍보나 외적인 치장의 측면에서만 쓴 게 아닐까 떨떠름한 느낌이 계속 남아 있었다. 그래서 좀 더 교육의 본원으로 들어간 글을 써야지 하고 숙제로 남겨 놓고 있었는데, 본의 아니게 외적인 사건들이 생겨나 글을 쓰는 것을 한참 망설인 측면이 좀 있다. 그래도 이 글이 꼭 특정한 단체뿐 아니라, 공교육을 포함한 보다 광범위한 교육자들에게 읽혀져 생각의 단초로 쓰여졌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고 기나긴 글을 써나갔다. 


미래는 점점 우리 앞에 다가오고 있다. 하지만 우리 교육은 좀처럼 바뀌지 않고 있거나, 너무 더디게 바뀌고 있다. 또 한편 제도는 바뀌고 있으나, 가르치는 사람의 생각은 여전히 20세기에 머물러 있다. 과연 우리가 미래가 달려오는 속도에 적절히 대응할 수 있을 것인가... 우려가 된다. 그러나 인간은 또 시시각각 변화하는 자연 앞에서 순간의 지혜를 짜내어 인류의 역사를 이어 왔다. 부디 이 글이 그 지혜의 한 끄트머리 조각 정도라도 되길 소망하며 글을 마친다. 


2016. 5. 26. 멀고느린구름.


뱀발 : 글이 갑자기 급 마무리된 측면이 있죠? 장시간 쓰고 있으려너 너무 힘들어서요^^;; 인간적 고통이니 모쪼록 양해를 ㅎㅎ 사실, 저 교육철학들을 그릇으로 삼아 어떻게 현대의 문제를 담을 것인가 부분도 얘기하고 싶었는데... 으윽... 생각만해도 엉덩이가 아픕니다^^; 또 다음 기회가 있으면~ ㅋ (언젠가 2부로 이어질 수도 있습니다^^;)


뱀발 2: 참고로 이 글의 자매글(?)이 있습니다^^;


미래의 교육 


핀란드 교육과 한국의 대안교육 1 ~ 5 


대안교육 20년, 더 이상 대안이어서는 안 된다 1, 2





날짜

2016. 5. 26. 12:29

최근 게시글

최근 댓글

광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