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참으로 피곤하구나! 내가 싹이 자라도록 많이 도왔다

- 소나무

 


개인적으로 존경하는 분의 책이 새로 번역되어 나와서, 얼른 사 읽던 중 눈길을 끄는 대목을 만났다.

 

“반드시 어떤 일이 있어야 하지만 바로잡으려 하지 말고, 마음에 잊지도 말며 자라도록 돕지도 말아야 한다. 송나라 사람과 같이 하지는 말아라. 송나라 사람 중에 싹이 자라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뽑아놓은 사람이 있었는데,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돌아와서 식구들에게 말했다. ‘오늘은 참으로 피곤하구나! 내가 싹이 자라도록 도왔다.’ 그 아들이 달려가 보았더니 싹은 말라 있었다. 천하에 싹이 자라도록 돕지 않는 사람이 적다. 유익함이 없다 해서 버려두는 사람은 싹을 김매지 않은 사람이다. 자라도록 돕는 사람은 싹을 뽑아놓는 사람이다. 비단 유익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해치는 것이다.”

 

이 말은 맹자가 그의 제자 공손추에게 호연지기를 기르는 법을 말하는 가운데 나온다. 이 이야기에서 특히 강한 인상을 남기는 부분은, ‘오늘은 참으로 피곤하구나! 내가 싹이 자라도록 도왔다.’라는 표현이었다. 이 말을 한 사람의 심정이 이해가 되었던 까닭이다. 쉽사리 웃어버리고 말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이렇게 말하면서 짐짓 스스로 기꺼워하는 사람을 내게서도 보았기 때문이다.

 

대안학교 교사로서 살면서 내가 이 사람과 같은 마음으로 살았던 시절이 분명히 있었다. 10여년의 교사 생활에서, 교사로서 내가 알고 있거나 믿고 있는 지식과 신념을 아이들에게 전수시키고, 제대로 이해시켜야 한다는 바쁜 마음가짐(욕심)에서 놓여나기 시작한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다. 아이의 정서 상태와 기질, 특장을 보면서 아이의 리듬에 맞춰서 공부와 생활을 함께 하는 것이 그 요점일 텐데, 지금도 가끔 내 급한 마음을 앞세우는 경우가 허다하다.

 

실제로 아이들—아이 각자의 정서와 행동 특성, 특장—을 중심에 놓고 생각하는 것이 어려웠던 요인으로는 내 자신의 교사로서의 자의식—뭔가 모범이 되어야 하고, 또 올바르며 될 수 있으면 모든 문제에 대해서 ‘답’을 제시할 수 있어야하는 등—이 과도했던 것이 제일 큰 것이었다고 본다. 그런데 아이들과 생활하면서, 아이들이 이 세상을 대면하면서 겪을 당혹스러움과 두려움, 중압감, 역으로 아이들이 좋아하는 것들을 이해하는 폭이 넓어졌던 것 같다. 특히 사춘기 아이들의 심리, 행동 발달 특성에 대한 이해가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좀 더 배려하고 좀 더 기다려주는 것이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이라는 결론에 이를 수 있었다. 내가 교사로서 지켜야할 것은 나의 원칙이나 나의 문제해결 방식이 아니었다. 오히려 나의 유연함이었다. 아이들에게 좀 더 유연하게 대응하고 좀 더 다양한 문제해결 방식을 구하도록 도와주는 것이었다. 물론 이런 태도가 곡학(曲學), 혹은 학생들의 비위를 맞추는 식의 태도와는 엄밀하게 구분되어야 함은 잘 알고 있다.

 

다시 한 번 찬찬히 읽어본다.

 

“반드시 어떤 일이 있어야 하지만 바로잡으려 하지 말고, 마음에 잊지도 말며 자라도록 돕지도 말아야 한다.”

 

그렇다. 정말이지, 진짜 큰 문제가 있었고 지금도 있다. 예를 들어 교육과 관련지어 말을 해보면, ‘아이가 신체적 안전과 정서적 안정 속에서 행복하고 건강한 생활을 하고, 일과 공부를 통해 자신의 존재를 실현하도록 돕는 일’—이것이 ‘반드시 있어야할 어떤 일’이라고 말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이전에 일했던 실상사작은학교는 “깨달음은 나무처럼 자라난다”는 말을 내걸었다. 파자는 자유, 자립, 자연을 내세우고 있다. 문제는 이런 언설을 일종의 증험적 사실로 경험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을 내가 간과했던 것이다. 그저 당연하고 멋있고, 그래서 더 이상 깊은 고민과 반성을 스스로에게 요구하지 않고, 이미 나에게는 전부 이뤄져 있는 어떤 상태로 간주하는 경향이 강했던 것 같다.

 

이것이 나의 첫 번째 문제였다. 일상 속에서 실증적으로 그리고 사실적이고 논리적으로 내실을 채워가지 않는 한 모든 말은 그저 희론(戱論)이고 공론(空論)일 뿐이었다. 도를 논하고 이상을 논하고 할 때 부처와 예수의 경계가 어느 덧 나의 경계이고, 이상의 완전함과 아름다움이란 얼마나 황홀한가! 그러나 그 높은 기치를 내건 이상은 아이들에겐 넘을 수 없고 이해할 수 없는 어떤 벽이 될 수도 있다. 폭 넓게 펼쳐지고 실생활 속에서 다양하게 변주되어 자신의 음감으로 혹은 색조로 인지될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 인식을 함께 즐기고 누리는 것이 중요했다. ‘반드시 있어야 하는 어떤 일’은 교사의 마음속에만 있어서는 부족하다. 교사의 마음과 아이의 마음이 교감하는 가운데 늘 상기되고 견지되는 어떤 삶의 원리가 되어야 한다.

 

두 번째 문제는 마음이 너무 앞섰다는 것이다. 이 경우 문제의 원인은 ‘마음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을 잊어버린 것이다. 내가 이 학교의 교사로 사는 이유는 무엇인가? 파자의 존재 이유는 무엇인가? 그 큰 혹은 근본적인 이유를 어떤 이유로든 잊어버리거나 부차적인 것으로 치던 경우가 많았다. 특히 매일 매일의 교육 현장에서 아이들의 학습-생활지도에 매달려 전체에 대한 조망을 놓쳐버리고 절제와 균형감각을 상실하는 경우가 많았다.

 

세 번째로 나의 전문적인 역량의 한계라는 문제도 있었던 것 같다. 다양한 역할을 수행하고 기민한 대응이 필요한 때가 많은 대안교육 현장에서 자칫 빠지기 쉬운 함정이 전문적인 교사역량인 것 같다. 교사역량이 전문화되지 않았을 때의 문제는 우선 당장 단기적인 교육/생활지도 역량의 미숙함 혹은 부족으로 드러나게 된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미숙한 교사는 학교가 목표하는바 장기적인 인간상, 혹은 교육철학을 충분히 담지해내지 못하게 된다는 데 있는 것 같다. 그렇게 평소에 진정 여유롭고 평안하지 못했던 까닭에 성마른 반응을 하는 경우가 많았다.

 

네 번째 문제는 ‘김매지 않는 사람’을 오래 두고 보지 못하는 개인적 습성인 것 같다. “유익함이 없다 해서 버려두는 사람은 싹을 김매지 않은 사람이다.”—이 말대로다. 어떤 말을 해서 먼저 반응을 보이고, 내가 한 말을 잘 새겨들으며 곧잘 어떤 성과를 만들어내는 아이들을 보면 마음이 흐뭇하다. 이 흐뭇함은 참 묘하다. 어느새 자기 말을 잘 듣는 아이들을 좋아하는 데까지 나가게 되기 때문이다. 좋아함에 적절한 선을 긋고, 다른 아이들과의 관계를 인식하여 좀 더 평등하게 대하는 되는 데까지는 늘 시간이 걸렸다. 그렇게 결과적으로 일련의 과정을 거친 후 내 자신의 내면의 풍경은 조화로워지고 어느 정도 평화를 얻지만, 그 과정에서 흐뭇함에 대한 나의 반응 때문에 편향적인 시선을 받거나, 나의 편견으로 인해 고통을 받았을, 혹은 오해를 했을 아이에게 나는 좋지 못한 교사였다. 공평무사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이 말이 더 가슴 아프다:

 

“자라도록 돕는 사람은 싹을 뽑아놓는 사람이다. 비단 유익함이 없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그것을 해치는 것이다.”

 

다시 본다.

 

“천하에 싹이 자라도록 돕지 않는 사람이 적다.”

 

이 말을 보니, 다시 나를 위로하고픈 생각이 기어들어 온다. 다 그러고들 산다잖아. 뭘 애써, 그렇게?! 게으른 농부는 좀 그렇지 않아? 너도 태평농법 싫어하잖아! 나라는 인간도 참 그렇다. 대안교육 자체가 사회문화적인 조류를 거슬러 다른 색깔과 흐름을 만들어내려는 의도를 갖고 있고 있다. 싹이 자라도록 돕지 않으려고, 억지로 조장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자라게 하고 열매 맺게 하려고 시작한 교육운동이다. 그 속에 들어와 있으면서도 떨쳐내지 못하고 있는 타성을 본다. 주의 깊게 살피지 않으면 어느새 수렁이다!

 

관건은 조급해하지 않고, 억지 부리지 않는 것이다. 일시적인 감상에 빠지거나 일희일비하지 않는 것이다. 하나를 놓치지 않되 유연하게 응하는 것이다. 좀 더 논리적이고 합리적이어야 한다. 예의 송나라 사람은 ‘싹이 더디 자라는 것이 안타까워’ 큰 덕을 베풀었다. 안타까움과 기대치는 거의 비례하기 마련이다. 정말 많은 고민을 했을 것이다. 고민을 한 후에 제법 은밀하게 선행을 베풀었고 일을 한 후 기분 좋은 피로감마저 느꼈다. 그러나 그는 지혜롭지는 못했다. 줄기와 잎사귀 자라는 것만을 염두에 두었을 뿐 뿌리를 살피지 못했다. 안타까운 마음을 주체하지 못한 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사리분별 없는 짓을 하고 만 것이다. 그래서 다시금 새겨본다.

 

“반드시 어떤 일이 있어야 하지만 바로잡으려 하지 말고, 마음에 잊지도 말며 자라도록 돕지도 말아야 한다.”



2014. 4. 6. 



날짜

2014. 4. 9. 06: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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