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조(노동조합)는 좀 그렇지 않나요?
- 멀고느린구름
내가 국어 교사로 중학교 아이들을 만나던 시절의 이야기다. 교과서의 지문 중에 노동조합원과 사용자가 근로조건에 대해 협상하는 내용이 나왔다. 노동조합을 주제로 다룬 지문이 아니라, '협상의 대화법'이 주제가 되는 지문이었다.
기억하기로는 지문 속의 노동자와 사용자는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경청하고, 각자 조금씩 양보해서 적절한 협의안을 마련하고 악수를 했다. 중학생들을 상대로 한 교과서 지문으로서는 아름다운 결말이었지만, 현실에서는 좀처럼 볼 수 없는 일이었다.
우리 아이들은 아마도 앞으로 점점 더 정규직이 되기는 어려울 것이다. 평생 직장이라는 말은 사라질 것이고, 5년을 주기로 이직을 해야하는 상황에 처할 가능성이 높다. 이직이라도 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고 있으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러나 꽤 많은 아이들은 아마 이직 시장에 적응을 못한 채 첫 번째 직장에서 퇴직함과 동시에 장기 실업자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 뒤로는 여유 자본이 있으면 치킨집 사장이 되거나, 아니면 비정규직으로 대부분의 남은 생을 살아갈 것이다.
이건 내 독단적인 전망이 아니라 여러 미래학자들이 미래 노동시장 전망을 예측한 책을 읽고 난 후 알게 된 것이었다. 회사가 고용인의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 시대가 된다. 그렇다면 다가올 미래일 수록 아이들에게는 상호 연대의 힘이 필요하다.
말이 나온 김에 나는 아이들에게 내 아르바이트 경험과 노동조합의 중요성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줬다. 나는 고등학생 때 신문배달을 하는 것으로 처음 아르바이트를 경험했다.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서 할당된 200가구 정도에 신문을 돌리면 한 달에 10만원인가, 15만원인가 정도를 받았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하면 말도 안 되는 노동착취다. 그러나 당시에는 그런 것도 모르고 그냥 돈이 생기는 것만 기뻤다.
대학생이 되어서 처음 한 아르바이트는 기숙사 우유배달과 학생식당 설거지 보조였다. 장학금 명목으로 월급을 주는 것이었기에 고용주의 착취도 없고 임금 수준도 높았다. 그러나 기숙사를 나와서 사회의 아르바이트 현장에 들어서자마자 세계는 전혀 달라졌다. 처음 일하게 된 카페에서는 시급 1,800원을 받았다. 최저 시급이라는 제도가 이제 갓 생겨서 거의 의미가 없던 시절이었다. 당시 커피 가격은 2,500원. 짜장면 값은 2,000원이었다. 그래도 그 카페에서는 고급 기술을 배울 수 있어서 보람이 있었다.
그러나 이후 하게 된 공사장 인부, 학원 강사, DVD방, 유선방송사 수위, 한식 패스트푸드점 알바 등등의 일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노동시간에 비해 임금은 낮았고, 몇몇 업체의 나에 대한 처우는 모멸감으로 자살하지 않은 게 다행일 정도였다. 돈을 떼인 적도 있었다. 지금 와서 일일이 따져보면 전부 다 노동법 위반이었다.
제법 좋은 대학교에 다니고 있었던 내가 굳이 과외를 하지 않고, 노동의 길을 선택한 것은 아버지 덕분이었다. 아버지는 공장 노동자였고, 노동조합의 조합원이셨다. 어렸을 때부터 나는 땀 흘려 일하지 않고 쉽게 번 돈은 금방 사라지기 마련이라고 배우며 자랐다. 아버지가 매일 밤 9시가 넘어서 퇴근을 하고, 토요일까지 반나절을 일해서 버는 월급은 130만 원 정도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렇게 자라온 내가 일주일에 4번을 나가고 합쳐 봤자 10시간 남짓을 일해서(물론 수업 준비를 착실히 한다면 5시간 정도를 더 써야 하긴 하지만) 40-50만 원 정도의 돈을 받는 것은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내 경험담을 마무리하며 나는 아이들에게 훗날 직장을 가지면 꼭 노동조합에 가입해야 좋다고 말해주었다. 그런데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노동조합은 좀 그렇지 않나요?"
깜짝 놀랐다. 누가 이 아이들이 노동조합을 좀 그런 것으로 생각하게 만들었을까. 아이들이 생각하는 노동조합의 이미지는 최근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가 이야기한 것 그대로였다. 쇠파이프를 들고 자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이기적으로 시위하고 파업하는 싸움꾼들. 우리 사회의 기득권이, 큰 영향력을 가진 언론이, 노동조합의 이미지를 그렇게 바꾸어 놓고 말았다. 어른들의 잘못은 돌이킬 수 없다.
그러나 아이들에게 마저 중립적인 시각도 아니고, 부정적인 시각을 각인 시켜 놓아야 할 필요가 있을까. 미래는 아이들이 판단하고 결정할 일이다. 그러나 오늘과 똑같은 예정된 미래를 어른들의 잘못으로 되풀이해서야 되겠는가.
나는 아이들에게 그런 인식을 갖게 된 배경을 물었다. 아이들의 입에서 예상된 답변들, 언론 보도, 어른들의 이야기 등등이 흘러나왔다. 이어서 나는 여러분들은 미래에 어떤 일을 하고 있을 것 같냐고 물었다. 여기서 아이들이 '노동조합은 좀...'이라고 말하게 된 배경을 읽을 수 있었다.
아이들은 아무도 자기가 '노동자'가 된다고 생각하지 않고 있었다. 노동자는 노동 행위를 하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다. 그럼에도 아이들의 인식 속에 '노동자'는 공장 및 건설 노동자 등과 결부되어 있었고, '노동'의 의미는 육체를 쓰는 노동으로 협소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글을 쓰는 것도, 노래를 부르는 것도, 방송 진행자가 되는 것도, 전문경영인으로 경영을 하는 것도, 회사에서 사무를 보는 것도 모두가 노동이다. 그런데 아이들은 자신의 희망직업을 '노동'과는 급구 연결시키지 않았다. 아이들은 오히려 '사용자'로서 노동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이들은 되려 자기가 만약 사장이 된다면 노동조합이 있을 경우 힘들 거라고 예상하고 있었다.
나는 무분별한 '리더십 교육'이, 그리고 부모들의 과도한 기대가 아이들의 모습을 만들었으리라 짐작할 수 있었다. 아이들에 대한 교육은 대체로 '리더'로서의 자질 함양에 맞추어 진다. 여기서 리더가 자신의 삶을 주체적으로 리드할 수 있다는 자립적 의미에서의 리더라면 좋겠지만, 대체로 한국의 리더십 교육은 집단에서의 리더 교육에 포커스를 맞추고 있다. 그리고 이 리더의 모습은 대체로 '사용자'의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많은 부모들은 아이가 '리더가 아닌 것이'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 또 많은 부모들은 '사장', 즉 '사용자'로서의 자녀를 기대한다. 대한민국의 부모들 중 대다수는 공장 및 건설 노동자가 되어 있는, 혹은 편의점 점원이 되어 있는 아이의 모습을 상상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우리는 이제 그런 상상을 해야한다. 대한민국의 경제 성장률은 2%대다. 앞으로 여기서 갑자기 성장률이 높아지는 기적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대한민국은 이미 충분히 성장한 나라다. 이미 우리가 더 올라가야 할 언덕 위에 있는 나라들은 프랑스, 독일, 영국, 미국 등의 선진국밖에 남지 않은 것이다. 성장률이 2%대라는 것은 단순화해서 말하면 개천에서 용이 날 확률이 2% 미만이라는 것과 다르지 않다. 우리의 다음 세대는 대체로 자기가 살던 대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대한민국은 더 이상 경제 계층 이동이 유동적인 나라가 아니다. 오히려 많은 아이들이 부모 세대보다 훨씬 더 경제적으로 못 살게 될 가능성이 오히려 높다.
부모세대는 그나마 고용 안정성의 혜택이라도 누렸지만, 다음 세대는 그런 것마저 없다. 사용자들은 더 이상 노동자를 평생 고용하지 않는다. 사용자의 마인드를 가지고 꾸려온 나라의 결론이다. 고용 안정성이 불안정해지면 결국 사람의 삶이 불안정해진다. 이것을 보완할 방법은 복지를 늘리는 방법밖에 없다. 그러나 이명박정부 이래로 국가는 복지에 인색하다. 입으로만 복지 정책을 펼치고 실제로 돈을 풀지는 않는다. 참여정부 때 강제적으로 매년 비율을 늘리도록 해놓은 조항에 기대어 매년 복지 비율이 높아졌다고 생색을 내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국가도 기업도 노동자의 삶을 보장해주지 않는 사회에서 미래의 아이들이 삶의 안정성을 지키는 방법은 연대 밖에 없다. 서로 처지가 비슷한 사람끼리 모여 힘을 내고, 목소리를 내서 최후의 보루인 노동법을 지키도록 싸우는 수밖에 없다. 최근 생긴 청년유니온(청년이면 누구나 가입할 수 있는 노동조합)은 힘을 모아 아르바이트생의 처우를 개선하는데 성공했다. 배달 아르바이트생들이 30분 내에 배달을 하도록 강제한 사업체들의 조항을 위법화 시킨 것이다. 빨리빨리 배달을 하다가 교통사고를 당하는 청년들이 수백, 수천에 달하는 헬조선의 상황을 그나마 조금 개선한 것이다. 청년유니온이 나서기 전에는 아무도 이 문제에 실제적 관심을 가지지 않았었다. 정부도, 사용자도, 소비자도, 그 누구도.
정말로 귀족인 사람들이 임금 투쟁을 하고,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는 노동자들을 향해 '귀족 노조'라고 손가락질을 한다. 중세 유럽사를 다시 써야 할 판이다. 노동을 하는 귀족이라니. 진짜 귀족이 들으면 예끼 이놈! 하고 호통을 칠 소리가 아닌가.
그러나 불행하게도 다수의 대한민국 시민들에게 '귀족 노조' 프레임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우리들이 이미 '사용자'의 시각을 내면화하고 있는 덕분이다. 그리고 이는 중립적이지 못한 교육의 문제다. 노동자의 입장만을 일방적으로 강요하는 교육이 있다면 그것 또한 문제일 것이다.(물론, 그런 교육은 건국 이래 실시된 바가 없다.) 아이들은 상대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하고 협상할 아량을 기르는 편이 좋다. 단, 다수인 노동자의 입장을 먼저 이해하고, 소수인 사용자의 입장을 이해하는 것이 되어야 순서가 맞지 않을까. 어째서 우리들은 우리 사회의 소수에 지나지 않는 사용자의 입장을 먼저 이해하도록 교육 받는 것일까.
모르긴 몰라도 전직 교사로서 내가 이 정도의 말만 해도, 무슨 좌익 사상 교육을 하려 한다, 전교조 조합원 아니냐는 둥의 비난이 쏟아질지 모른다. 허나 나는 교사로서 아이들의 미래에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런 비난 쯤 얼마든지 받아도 좋다고 생각한다.
"노동조합은 좀 그렇지 않나요?"
아이들에게 말하고 싶다. 좀 그렇지 않다. 노동조합이 싫다면 그럴듯하게 '유니온'이라고 부르면 되지 뭐.
노동의 사각지대에 있는 청소년 노동자들이 무척 많다. '알바생'이라는 이름으로 퉁쳐진 채, 최저 임금의 혜택도 누리지 못하는 청소년 노동자가 전체의 청소년 노동자 중의 40%에 달한다고 한다. 생계를 위해 노동 현장에 나서고 있는 청소년들도 아직 많다. 현장 실습이라는 미명하에 무임금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고 있는 청소년도 수만 명에 달한다. 그 아이들을 착취하고 괴롭히고 있는 이들이 다 누구인가? 바로 우리 어른들이다. 부디 거울을 보고 살자.
2015. 9.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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